(사진: <창조의 재료탱크> ThinkTanker)
[‘미스터 기본기’ 팀 던컨은 어떻게 승리자가 되었나]
역사는 때론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불운이 엄청난 행운으로 바뀔 수 있다.
1996년 샌안토니오 스퍼스가 그랬다. 팀의 양 축 데이비드 로빈슨과 션 엘리엇이 모두 불의의 부상을 당해 그해 샌안토니오는 20승 62패라는 참담한 시즌을 치렀다. 높은 드래프트 순위를 받기 위해 시즌 후반부 전력을 기울이지 않은 탱킹을 했다는 비난이 있었지만, 아무튼 핵심선수 2명이 부상당했다는 것은 불운이었다.
그렇다고 1순위 드래프트 지명권을 받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확률(21.6%)은 낮았다. 샌안토니오의 프리 로터리 순위는 보스턴 셀틱스와, 벤쿠버 그리즐리스에 이어 3순위이었다. 1순위는 높은 확률(27.5%)을 가진 보스턴으로 갈 것 같았다.
그러나 행운이 따랐다. 놀랍게도 샌안토니오가 1997년 NBA 드래프트에서 1순위 지명권을 획득한 것이었다. 그들은 주저 없이 팀 던컨(39·211cm)을 뽑았고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어떤 의미에서 로빈슨과 던컨의 조합은 반칙이자 사기 라인업이었다. NBA를 대표하는 4대 센터 로빈슨에 대학농구의 슈퍼스타 던컨이 가세한 인사이드는 다른 팀에게 악몽으로 다가왔다.
로빈슨의 강점은 스피드였다. 센터임에도 스몰포워드에 육박하는 놀라운 빠르기와 수준 높은 페이스업 플레이로 골밑을 장악했다. 또 하나의 강점은 로빈슨이라는 인간 자체가 ‘나이스 가이’였다는 점이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고 공부까지 잘했던 해군장교 출신이었다. 미국 판 ‘흑인 엄친아’였다. 이런 로빈슨과 프로 입단부터 함께하며 그의 ‘실력’과 ‘품격’을 함께 배운 것은 던컨에게 엄청난 행운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실력’과 ‘품격’을 갖춘 로빈슨이 1997년 시즌을 앞두고 던컨을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이다. 그 로빈슨의 느낌이 제프 세비지의 저서 <팀 던컨(Tim Duncan)>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나도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던컨은 나보다 스피드가 더 좋았다. 인성 역시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다.”
던컨은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실력과 품격이 NBA에 데뷔하기 전부터 이미 기본 틀을 갖추고 있었다. 로빈슨은 던컨에게 크게 농구에 관해 알려줄 필요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강조했다.
“I’ ve tried to help him understand that if you don’t prepare yourself, you won’t perform well. most of what you do on the floor comes from preparation.”
경기에 대한 준비였다. 농구라는 플레이에 대한 준비, 자기 자신에 대한 준비였다. 던컨은 이점을 잊지 않았다.
역사의 시작은 순조로웠다. 기대대로 던컨은 승승장구했다. 1997년 10월 31일 덴버 너기츠와의 경기는 그의 데뷔전이었다. 첫 경기부터 35분을 뛰며 더블더블(15득점 10리바운드 2블록)을 했다.
최종적인 루키 시즌 성적은 평균 21.1득점 11.9리바운드 2.5블록이라는 가공할 성적이었다. 이미 베테랑 빅맨의 기록이었다. 116표 가운데 113표를 얻어 당연하다는 듯이 던컨은 신인상을 차지했다. 1997-1998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도 던컨은 제이슨 키드가 버틴 피닉스 선즈를 쉽게 이기고 2라운드에 올랐다.
하지만 역사는 ‘시작’은 됐을지라도 그것이 ‘역사’라는 이름이 붙기까지에는 고난과 어려움이 반드시 따르게 마련이다.
던컨이 플레이오프에서 상대한 유타 재즈의 칼 말론은 NCAA 3월의 광란에서 상대한 파릇한 빅맨들과는 수준이 다른 선수였다.
그는 리그 최고의 파워포워드였다. 지난 시즌 이미 서부컨퍼런스를 제패하며 마이클 조던과 파이널에서 맞장을 뜬 구렁이 중의 구렁이였다. 말론은 보디빌더를 연상케 하는 근육질의 몸을 이용한 힘이 넘치는 움직임과 지능적인 팔꿈치 반칙, 확률 높은 미들 점퍼로 던컨에게 “파워포워드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줬다.
특히 아래의 장면은 상징적이다.
(1998년 플레이오프에서 던컨은 말론의 퍼스트스텝을 당해내지 못했다.)
말론은 1998년 36세의 노장이었다. 물론 기량은 크게 변함없었지만 스피드는 21세의 던컨에 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사진처럼 왼쪽 스트롱 사이드에서 공간이 열린 오른쪽을 대신해 노련한 퍼스트 스텝으로 왼쪽 베이스라인으로 파고들며 예상치 못한 왼손 덩크슛을 작렬, 여러 차례 승부처에서 던컨을 농락했다. 결국 샌안토니오는 유타에 1승 4패로 탈락했다.
던컨이 플레이오프에서 처음 맛본 패배의 쓴잔이었다. 경기에 대한 준비, 자기 자신에 대한 준비가 됐을지라도 NBA에서 승리자가 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체험했다.
그래도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은 ‘준비’였다. 준비가 되면 어떤 경기도 자신이 계획한 농구를 펼칠 수 있다. 준비를 위해서는 꾸준함이 필수적이다. 꾸준한 준비가 결국 코트위의 꾸준한 플레이로 나타났다.
프로 생활 내내 붙었던 던컨의 별명은 ‘미스터 기본기’, ‘빅 펀더멘탈(The Big Fundamental)’, ‘그라운드호그 데이(Groundhog Day)’, ‘죽음과 세금(Death & Taxes)’이었다. 모두가 변함없는 코트위의 활약,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플레이 때문에 붙은 닉네임이었다. 겉멋을 부리는 화려한 플레이는 그와 양립할 수 없었다.
마음가짐의 준비는 평정심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NBA에서 팔꿈치를 쓰는 빅맨이 어디 말론뿐이었을까. 억울한 장면도 던컨은 많이 겪었다. 그러나 그는 심판에게 격렬하게 항의하거나 상대의 도발에 말려들지 않았다. 던컨은 대학시절 심리학을 공부했고 이때 마음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그가 깨달은 것은 ‘침묵의 힘(Power of Silence)’이었다.
왜 격렬하게 항의하지 않는지에 대해 던컨은 세비지와의 인터뷰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상대의 멘탈을 무너뜨리는 방법이다. 흥분할 시간에 마음을 가라앉히면 득점을 더 할 수도 있고, 리바운드 하나를 더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히려 역설적인 심리전의 대가였던 것이다.
이듬해 그는 달라졌다. 두 번의 패배는 용납하지 않았다. 1999년 뉴욕 닉스와의 NBA 파이널 5차전에서 던컨은 팀이 올린 78점 가운데 31득점을 혼자 올리며 맹활약했다. NBA 첫 우승이었다. 2003년 로빈슨이 은퇴하고 홀로서기를 했음에도 변함없었다. 그는 최종적으로 4차례나 더 정상에 오르며 마침내 전설이 됐고 역사가 됐다.
올해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던컨은 탈락했다. 이제 그의 나이는 한국 나이로 마흔 살이다. 팀은 패했지만 던컨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그는 조용히 침묵하며 리바운드를 잡았고 뱅크샷을 성공하고 수비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이제 그를 코트에서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또 다시는 볼 수 없는 그의 플레이를 기억하기 위해 NBA2K15를 통해 그의 MIX 영상은 이런 이유 때문에 만들었다.
Forever~ Mr. Fundamental!
By ThinkTanker
' 창작물 & 창조적 글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성이란 야구팀의 경쟁력...'윌리 핍' 기회의 소중함과 불안함 (0) | 2015.05.12 |
---|---|
MLB 더쇼15, 미겔 카브레라 수비 판단의 치명적 결과 (1) | 2015.05.11 |
한화의 이치로, '3번 타자' 김경언의 몰상식 (1) | 2015.05.04 |
NBA2K15 진기명기 Mix...BEST & Funny Moments (0) | 2015.05.02 |
타협으로 하는 결혼은 절대 성공 못한다 (0) | 2015.04.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