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고리는 왜 강할까...사회적 유대의 역설
[왜 친한 친구는 나한테 도움을 주지 못할까]
이 용어를 처음 본 것은 말콤 글래드웰의 <티핑 포인트>를 통해서였다.
‘약한 고리의 강한 힘(Strength of weak ties)’이었다.
나와 사회적으로 약한 유대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강한 유대감을 가진 사람들보다 실제적으로 내게 더 도움을 준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요즘에는 거의 SNS 확산과 발전에 성경과도 같이 지지받는 이론이 됐다.
그때는 이 말을 그렇게 크게 실감하지 못했다. 용어도 금방 내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또 몇 년이 흐르고 나는 실제로 ‘약한 고리’와 유사한 사람을 만났다.
우연히 내가 인터넷에 썼던 글을 보고 어떤 분이 나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내 글을 보고 내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또 썼던 글에 대해 대화를 나누어보고 싶다고 메일을 보내왔다. 조금은 의아했지만 흥미로웠던 주제였기에 나도 어떤 분일까 호기심이 발동해 그 분을 만났다.
그 분은 싱크탱커보다 10살 이상 나이가 많으신 모 언론사 현직 기자였다. 당시 사회부 부장을 맡고 계셨다. 매우 독특한 분이었다. 내가 썼던 주제에 대해 자신만의 데이터를 구축하고 있었다. 엄청난 내공에 오히려 내가 더 많은 부분을 배울 수 있었다. 1시간 조금 넘도록 즐거운 대화가 이어졌고 우리는 연락처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언제든지 필요하면 나에게 연락하세요.”
그때 그 분이 헤어지면서 내게 했던 말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몇 달간 연락하지 않았다. 만남의 순간에는 유대감이 있었지만, 만남 이후에는 유대가 이어질 만한 그 어떤 인간적 상호작용도 없었다.
그런데 정말로 이후 내게 어떤 부분에서 필요한 상황이 생겼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그 분에게 연락을 했다. 요즘 유행하는 ‘허언증’과는 거리가 먼 분이었다. 그는 내가 정말로 필요했던 핵심 정보를 내게 넘겨주었고 나는 그 정보를 이용해 큰 도움을 얻었다.
그는 약한 고리였다. 단순히 만나서 1시간 대화 한 것 밖에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쉽게 끊어지는 고리가 아니었다. 그는 결정적인 정보를 내게 제공했고 강한 힘이 돼주었다.
그는 몇 년 전 승진을 거듭해 현재 ‘언론인의 꽃’이라는 편집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도 나와의 관계는 그때와 똑같다. 아주 가끔씩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강한 사회적 유대는 없지만 유대는 끊어지지 않고 수년째 흐르고 있다.
‘약한 고리의 강한 힘’을 그때부터 생각하게 됐다. 나 말고도 다른 사례가 없을까 하여 몇 명의 지인들에게 물어보니 반응들이 비슷했다.
“생각해보니, 그러네! 친한 친구들은 별 도움이 안 되는 경우가 많더라.”
이 용어의 기원을 알아보고 싶었다. 처음 주장한 사람은 스탠포드대 사회학과 교수 마크 그라노베터(Mark Granovetter)였다. 그는 1973년 사회학 저널인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에 이 ‘약한 고리의 강한 힘’을 논문으로 발표했다.
소수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보다 다양한 다수와 느슨한 관계를 맺는 편이 정보 획득의 효율성을 높이는데 보다 유용하다는 것이 논문의 주요 골자다. 그가 예로 들은 것이 취업 과정이다.
그라노베터는 수백 명의 취업 과정을 인터뷰 한 결과, “개인적인 연고로 취업한 사람들 가운데 83%가 자신에게 직장을 소개해 준 사람이 친한 친구가 아니라 약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었다”고 지적했다. 강한 고리의 인맥에 의하여 추천된 경우에는 추천의 객관성이 의심을 받을 가능성이, 약한 유대 관계의 인맥보다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다.
하지만 여기서 되짚어 생각해 볼 부분은 역의 문제다.
반대로 강한 고리는 왜 약할까. 이런 사회적 유대의 역설은 왜 발생할까.
물론 힘이 강한 고리도 많다. 그러나 강한 고리임에도 의외로 힘이 약한 고리를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많이 목격한다.
매우 현실적인 얘기를 꺼내보자면, 첫 번째 이유에는 ‘인간의 질투심’도 한 몫 한다. 친구가 대표적이다. 친한 친구가 배신하고 결정적인 상황에서 도움을 구하면 한 발 빼는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친구란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유사한 사회적 상황과 생각의 유사성을 가진 사람이다.
하지만 자신과 매우 가깝다고 느꼈던 친구 가운데 누군가가 나보다 더 잘되거나, 더 좋은 대학에 입학하거나, 더 좋은 곳에 취업하거나, 더 많은 돈을 벌거나, 더 좋은 차를 타거나, 더 멋진 이성을 만나거나, 더 예뻐졌거나, 더 좋은 배우자와 결혼하게 되면 그렇지 않은 친구의 정신에 파장을 일으킨다.
친구라는 ‘동질성’이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급한 사례들이 내 친구에게 일어나도록 도움을 주지 않게 된다. 이런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하게 생각해보자.
물론 아닌 경우도 있고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는 친구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왜 우리 민족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을 만들었을까. 왜 서양 속담에는 “친구란 나를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다”라는 무서운 언어를 만들었을까.
싱크탱커가 너무 세상을 삭막하게 바라보는 것일까. 사실 나는 매우 긍정적이고 밝은 인간임을 자부한다. 그러나 때로는 이렇게 원초적 본능이라는 이기적 인간을 위해 인간 사회의 마이카벨리즘을 인정해야 할 경우도 있다. 마이카벨리의 ‘군주론’이나 로버트 그린의 ‘권력의 법칙’ 등을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지금 내가 이야기한 사례들은 참 착한 일화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이유인 창의적 관점에서 바라봐도 결론은 유사하다.
창조는 결합이다. 나와 다른 생각, 다른 분야, 이종 학문간 통섭이 이루어질 때 창의성 아이디어가 발현되는데 유리하다. 약한 유대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그렇다.
그들은 나와 다른 분야에서 다양한 사고과정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창의성 기법이나 아이디어의 크로스오버가 이루어질 확률이 그만큼 높다. 언급한 모 언론사 편집국장은 내가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던 사람이었다.
반면 친한 친구나 지인은 나를 너무 잘 안다. 생각도 비슷하다. 바라보는 시각도 유사하다. 1+1이 2가 아니라 또 1이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거리가 먼 사람을 덜 신뢰하지만, 그들이 가진 정보와 접촉은 우리가 거기에 직접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더 소중한 것일 수 있다.
도움과 기대 심리의 세 번째 측면도 마찬가지다.
원래 누군가를 도울 때 나도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받기를 기대하면서 도와주면 추접스러워 지는 것이 ‘선의’이다. 약한 유대 관계의 고리는 이런 것이 없다. 유대 관계가 약하기 때문에 도움의 상호작용이 반드시 요구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도움이 발생하면 의무감 없는 고마움이 더욱 커진다.
이 점을 유사하게 인맥 관리에 활용했던 연예인이 마당발로 알려진 박경림이다. 그녀는 누군가를 도울 때 절대로 되돌아오는 도움을 생각하지 않으며, 약한 유대 관계를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고 자신의 책과 여러 방송을 통해 밝힌 적이 있다.
하지만 친한 친구나 강한 유대 관계의 지인 사이에서는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 심리가 일어난다. 내가 뭔가 받았으니 다시 상대에게 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가슴에 생긴다. 받고 주어야 강한 유대 관계가 증명이라도 되듯이 행동하게 된다.
그라노베터의 ‘약한 고리의 강한 힘’ 이론을 모든 것에 일반화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약한 유대관계보다 강한 유대관계가 더 유리하다는 학설도 있고, 두 개를 사안에 따라 혼합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약한 고리가 강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는 절대 무시할 수 없다. 부담 없는 인간관계가 실제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역설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됐다는 실증적 증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이론은 40년이 넘도록 폐기되지 않고 살아남았고, 사회과학에 유의미한 학설로 자리를 굳혔다.
혹시나 이 글을 읽었다고 친한 친구의 진심만큼은 오해하지는 말자. 그래도 우정은 소중한 것이니까. 다만 배신과 질투도 우정 안에 녹아있을 수 있다는 것은 슬프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인간의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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