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기법

이어령의 100년 서재(4), 언어 만들기와 확장

ThinkTanker 2015. 10. 8. 07:00

 

(사진 출처 및 권리= KBS)

 

 

[단어의 생성과 여러 의미 입히기]

 

비밀이란 뜻의 영어 단어 ‘Secret’은 현대에 와서 흔하게 쓰이는 언어다.

 

하지만 이 단어는 600년 전 한 명의 크리에이터가 영문학에 새롭게 끌어들인 언어이기도 하다. 영어어원사전에 ‘Secret’14세기 후반 라틴어 ‘Secretus’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하는데, 그 유래를 이끈 사람이 바로 영어를 처음으로 문학의 영역에 끌어들였다고 평가받는 제프리 초서였다.

 

초서가 영어에 새롭게 추가한 단어는 1,000개가 넘는다고 알려져 있다. Secret(비밀)을 비롯해, digestion(소화), persuasion(설득), moisture(습기) 등 우리에게 친숙한 언어들이 그의 작품이다. 이런 언어들은 초서 이전에 앞선 작가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단어다.

B. Ford(ed), The Age of chaucer(london, 1963, P109)

 

 

초서는 언어에 도취되었다. <크리에이터스>의 저자 폴 존슨은 셰익스피어는 초서가 만들어 놓은 단어 은행을 물려받아 거기에 추가로 대량 예치한 것이다라고까지 그를 극찬했다.

 

실제로 언어 없는 창조란 있을 수 없다. 창조는 언어를 바탕으로 생각이 이루어지고 날개를 단다. 그래서 크리에이터가 언어를 직접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의 창조 작업에 매우 큰 위력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우리는 한국인이다. 굳이 셰익스피어가 만들어 낸 인간이 행한 악은 죽은 뒤에도 살아남고, 선은 흔히 뼈와 함께 묻힌다와 같은 멋진 말을, (물론 직접 만들면 훌륭하겠지만) 영어로 따라야 할 이유는 없다.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이 위대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인상적인 영화로 남아있는 <달콤 쌉사름한 초콜릿(1992)>만 봐도 알 수 있다. 원래 이 영화의 제목은 스페인어로 <Como Agua Para Chocolate>이다. 물로 끓인 초콜릿이라는 의미라 영어는 이것을 <Like Water For Chocolate>으로 받았다.

 

(사진= 영화 <달콤 쌉사름한 초콜릿>공식 포스터)

 

3개국의 영화 제목을 다시보자. 어디 스페인어와 영어가 감히 초콜릿에 달콤 쌉싸름하다는 의미를 녹일 수 있을까. 표현 자체가 불가능하다. ‘쌉사름은 우리만이 쓸 수 있고 알 수 있는 한글만의 매력이다. 만약 이 영화를 원 제목 대로 <물로 끊인 초콜릿>이라 개봉했다면 단언컨대 영화는 실패하거나 사람들에게 잊혔을 것이다.

 

제작자의 탁월한 네이밍이 이 영화의 멋을 살린 것도 좋았지만, 한글만의 오묘함을 특별하게 느낄 수 영화 제목이었기에 더 좋았다. 

 

쌉사름이란 말도 한국의 초서처럼 누군가가 분명히 만든 언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인이 이렇게 새로운 언어를 창조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언어는 창조와 생성만이 답은 아니다. 충분히 기존 언어에 새로운 의미를 녹여 다양한 변이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사진 출처 및 권리= KBS)

 

그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 지난달 26일 추석 연휴 기간 중 방송된 <이어령의 100년 서재> 6, 먹다편이었다.

 

6회에서 이어령 선생은 지난 시간부터 이어온 의식주의 이야기 가운데 ()’에 관련된 내용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함께 먹는 도시락으로 대표되는 함께 하는 식문화여기서 이어지는 음식을 통한 어울림의 문화를 강조했다.

 

하지만 이번 6회에서 싱크탱커의 눈을 가장 크게 사로잡은 내용은 방송 초반 선생이 먹다라는 말을 통해 다양한 사용을 끌어낸 창의적 기법이었다.

 

그렇게 많은 먹다가 한글에 있는지는 몰랐다. 방송에 참가한 패널들과 함께 찾자 여러 가지의 먹다가 나왔다.

 

대표적인 것이 나이를 먹다이다. 세월과 시간을 먹는다는 것을 장면으로 상상하면 가히 시각과 미각이 합성된 공감각이다. 한국인만 이렇게 쓴다. 또 있다. ‘욕을 먹는다이다. 욕을 어떻게 먹을 수 있을까. 욕을 먹으면 그 맛은 또 어떨까. 쓴 맛일까. 떫은 맛 일까. 선생의 지적처럼 욕은 정말로 뱉어야 한다. 먹어서는 안 되는 불량 식품이다.

 

꿀밤을 먹는다도 있다. 꿀밤을 때리는 사람은 있는데 왜 맞는 사람은 꿀밤을 먹는다고 쓸까. 축구에서 나오는 골을 먹는다도 한글만의 독특함이다. 선생은 영어권에서는 골을 실점(Lost one point)한다고 쓰지, 먹는다고 표현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떤 것을 결심한다는 마음을 먹다’, 물을 마시거나 안 좋은 일을 경험했다는 중의적 개념을 가진 물 먹었다도 있었다. 오락실에서 돈을 먹거나 뇌물을 받은 돈 먹었다도 추가됐다. 선생은 마지막에 이런 나의 표현, 나의 설명을 여러분이 이해했다면 말이 먹힌 것이다라고 멋지게 마무리를 했다.

 

이것 말고도 먹는다는 또 있다. 종이에 기름을 먹이다부터 어떤 물체에 액체를 스며들게 할 때도 먹이다가 쓰인다. 정말로 한국인들은 먹는 행위가 여러 가지다. 지금까지 언급한 먹다만 해도 벌써 의미가 11가지이다.

 

여기서 먹다를 다른 단어로 바꿔보자. 동사는 수천 가지다. 크리에이터가 언어를 확장하는 기법은 여기서 시작할 수 있다. 이어령 선생은 내게 그 방법을 일깨워줬다.

 

선생이 언급한 많은 '먹다' 가운데 결국 최종적으로 수렴된 맛은 가장 큰 개념인 살맛, 죽을 맛의 인생의 맛이었다. 인생의 맛이 달콤 쌉사름하게 맛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맛있는 인생은 멋있는 인생일 것이다. 그래서 ‘은 정말로 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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