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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기법

이어령의 100년 서재(3), 호기심과 디테일의 힘

 

(사진 출처 및 권리= KBS)

 

[‘Nothing’에서 ‘Something’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참으로 놀랍고도 신기하다.

 

어떻게 선생은 남들이 쉽게 보며 지나치는 무가치한 것들에 그토록 놀라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일까.

 

19일 방송된 <이어령의 100년 서재> 5, 살다편은 지난 4회의 하늘의 시선편과 연장선상에 있었다. 창의성 기법의 측면에서 하늘의 시선이 거시적 관점을 다루었다면 4, 살다는 미시적 관점에 관한 내용이었다.

 

하늘의 시선은 상층의 시선이었다. 전체를 폭 넓게 바라보는 눈을 강조했다. 반면 , 살다의 시선은 땅의 시선이자 사물을 깊고 정밀하게 바라보는 눈이었다.

 

5회에서 이어령 선생이 전달한 메시지는 반갑게도 평소 <창조의 재료탱크>가 자주 이야기 했던 창조는 결합이다와 유사했다. 선생은 21세기 창의성의 핵심인 융합과 결합사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래서 “Either A or B보다는 Both A and B의 시대를 열어라.”, “한국인은 모험을 즐기는 (네오필리아 Neophilia) 유목적 사고와 한 곳에 정착해 안정을 지향하는 (토포필리아 topophilia) 농경적 사고를 겸비한 융합의 DNA를 갖춘 풍요로운 문화 자원을 갖고 태어났다.”, “미래의 주거 공간을 분리의 아파트먼트가 아닌 통합의 콤파트먼트로 대표되는 사랑과 협력의 공동체로 만들자라는 3개의 핵심 메시지가 나왔다.

 

한국인은 태생적으로 창조 능력에 유리한 결합사고를 타고 났다는 선생의 설명에 희망과 용기를 갖게 되면서도, 싱크탱커의 눈을 가장 크게 사로잡은 것은 언급한 3개 메시지의 결론이 아니라 결론에 이르는 이어령 선생의 독특한 사고 과정이었다.

 

그것은 남 다른 호기심과 숨 막힐 정도로 자세한 디테일이었다.

 

두 가지 모두 크리에이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호기심은 모든 창의성 발현의 시작이다. 디테일한 관찰력은 호기심이 발전되어 나가는 추진제 역할을 한다.

 

(사진 출처 및 권리= KBS)

 

그럼 어떤 부분에서 이어령 선생의 특별한 호기심을 찾을 수 있을까.

 

방송 초반 선생은 마태복음 625절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에서 의()()()()’ , 집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이 너무 궁금했다고 했다. 정보의 공백을 스스로 채우기도 했다.

 

여기서 생각해보자. 마태복음 625절을 읽다가 의식주를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또 여기에 가 왜 빠졌을까라고 너무나 궁금해 하는 사람은 과연 존재는 할까.

 

시작부터 선생의 호기심은 이처럼 남다르다. 혹자는 이런류의 호기심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선생은 호기심을 단순한 공상으로 놓아두지 않는다. ‘의 한자 가 가진 함의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한자는 농경민이 만들었고, 농경민 역시 한 곳에 정착해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이기에 한자에는 농경적 발상이 담겨있다는 논리를 끌어낸다.

 

농경적 발상의 논리는 자연스럽게 상대 개념인 유목적 발상이 등장하면서부터 논의가 커지고 정착이냐, 모험이냐, 장소를 사랑하는 토포필리아와 새로운 것에 이끌리는 네오필리아의 비교로 확대된다. 네오필리아는 미국의 개척정신을 상징할 만큼 이제는 떠돌이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시대를 맞게 되는데, 토포필리아뿐만 아니라 이런 네오필리아를 균형 있게 모두 가진 한국인은 지난 70년간 놀라운 경제 발전을 보여줬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호기심은 이뿐만이 아니다. 선생은 어린 시절 목사님에게 노아의 방주에 물고기도 태웠나요?”라는 기발한 질문을 했다. 생각해보니 정말로 모든 생물 가운데 하나의 종인 물고기는 거대 홍수가 나도 죽지 않을 정도로 물 만난 고기가 된다. 굳이 방주에 탈 이유가 없다.

 

성냥팔이 소녀는 왜 얼어 죽었을까?” 역시 이채로운 호기심이다. 대부분은 소녀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 굳이 생각해볼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 보통은 성냥이 다 떨어져서 죽었다고 생각한다. 이어령 선생은 소녀의 앵벌이 가능성을 제시했다. 소녀가 성냥을 팔지 못하고 집에 들어가면 아버지가 때렸다. 소녀에게 집은 있었지만 자신을 돌봐주고 사랑해줄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동화를 자세히 읽은 사람만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아버지가 성냥팔이 딸을 돌보지 않았다는 것에서 서양 문화의 뿌리 깊은 그리스 로마 문화를 연결해 가정 보다는 폴리스 중심의 당시 남성 문화를 지적하고, 소크라테스 역시 아들을 키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재미있게 설명했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는 노동과 경제를 말하지 않았다.

 

(사진 출처 및 권리= KBS)

 

이런 호기심의 발현과 발전에는 디테일한 관찰력이 함께 했다. 디테일의 힘은 하나의 장면을 이룬 하나의 선을 넘어 하나의 점까지 바라보는 현미경 시선에서 비롯된다.

 

선생의 설명대로 그네 타는 장면만 봐도 그렇다. 위의 사진처럼 서양의 그림 속 여인들은 모두 앉아서 그네를 타지만 한국의 풍경화 속 여인들은 모두 그네를 서서 탄다. 단순한 그네 타기 속 자세가 한국인에게 유목적 DNA가 있음을 증명하는 증거로 연결된다.

 

이어령 선생의 저서 <유쾌한 창조>에는 선생이 전통 국악 악기 장고를 설명하는 부분이 나온다. “북의 양면이 쇠가죽과 말가죽이기에 동일한 북소리를 내는 일반 북과 달리 면마다 다른 소리가 난다는 내용은 디테일한 관찰력의 진수이다.

 

디테일은 생활과 체험 안에도 있었다. 선생은 시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에서 느닷없이 그렇다면 형님과 아빠는 어디로 갔나?”라는 호기심에서부터 시작해 도시와 건축 이야기로 방향을 전환한다.

 

서양의 건축물들을 관찰한 끝에 자연과 배산임수의 터를 중시하는 우리와 달리 서양은 터의 방향에 북향과 남향의 개념이 없다는 흥미로운 사실도 지적했다.

 

미국 유엔 본부도 모두 허드슨 강을 바라보고 있어서 남향이 아니다. 심지어 햇빛이 가장 많이 들어오는 곳이 화장실이고 제일 어두운 곳은 본회의장이다.” 선생이 유엔 본부를 화장실 조도를 확인하기 위해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놀라운 관찰력이 나온 것은 평소 사물을 바라보는 디테일한 시선과 습관에 기인함을 추론케 한다.

 

디테일은 한옥을 바라보는 눈에서 절정을 보여줬다. 누구도 자세히 잘 쳐다보지 않은 돌담을 돌의 모양은 제각각이지만, 돌들의 개성이 그대로 있으면서도 또 어울리기 때문에 돌담의 면이 된다고 묘사하는 순간 돌담은 예사롭지 않게 변한다.

 

무심코 지나쳤던 한옥도 선생의 눈으로 볼 때는 한국인이 가진 융합 사고의 결정체였다. 우리 조상들은 기후에 맞게 한옥을 폐쇄적이면서도 개방적으로 만들었고 소유도 공유도 아닌 개방된 집의 형태로 만들었다.

 

어디에서든 쉽게 볼 수 있는 팔각정 역시 8개의 방향에서 외부를 바라보면 바라보는 자가 있고 바라보는 자를 또 바라보는 다른 사람이 있다. 그 순간 인터랙티브한 팔각정의 팔경은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탈바꿈 된다.

 

(사진 출처 및 권리= KBS)

 

지금까지 언급한 대상들을 다시 떠올려보자. 성경 구절, 의식주, 노아의 방주, 성냥팔이 소녀, 그네, 장고, 한옥, 돌담, 팔각정...

 

개념적으로 어려운 것은 하나도 없다. 개념을 떠나 주변에서 모두 쉽게 보거나 한번쯤 체험도 했을 법한 대상들이다. 하지만 언급한 내용들을 생각하고 관찰하기는 쉽지 않다.

 

혹시나 이어령 선생이 어려운 내용을 말했을까. 아니다. 개념들을 끌어내고 이들을 결합하는 과정은 논외로 쳐도 다시 읽어봐도 몇몇 전문 용어가 나오는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난해한 내용들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대상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고 쉽다. 그러나 누구나 보는 그 대상을 호기심과 디테일한 관찰력을 통해 평범함 속에서 깊은 가치를 끌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결국 창조의 세계에서 결론은 명확하다.

 

누군가에게 무가치한 ‘Nothing’은 크리에이터에게는 유의미한 ‘Something’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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