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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기법

창의성 언어는 생어(生語)에서 나온다

 

(사진 출처 및 권리= <창조의 재료탱크>)

 

[좋은 글쓰기에는 왜 '살아있는 언어'가 쓰일까]

 

짝사랑이었다. 나는 중학교 국어 선생님을 혼자 좋아했다.

 

얼굴도 너무 예쁘셨다. 그런데 다른 선생님과는 색다른 그녀만의 특징이 그 시절 싱크탱커를 사로잡았다. 그녀의 교육관이 명시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떠올려보면 그녀는 학생들에게 줄곧 창의성을 강조했다는 생각이 든다.

 

대표적인 것이 ‘5분 말하기였다. 그녀는 국어 수업 시간이 되면 본격적인 수업 시작 전에 무조건 하루에 한 명씩 번호대로 교탁 앞에 나와 소재와 관계없이 어떤 것이든 5분간 말하기를 시켰다. 학생들이 사전에 쓴 원고를 선생님이 받았고 원고의 내용을 외워 발표하는 5분 말하기가 끝나면 가벼운 강평이 이어진 뒤 수업에 들어갔다.

 

이런 국어 수업이 학생들에게는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아직은 청소년이었다. 차라리 소재라도 정해주시지. 도대체 밑도 끝도 없이 무슨 말을 뜬금없이 5분씩이나 남들 앞에서 하라는 것인가. 5분이란 시간은 생각보다 길다. 농구에서도 5분이면 15점 차의 승부가 뒤집어 지는 매우 긴 시간이다. 원고지로 쳐도 10장은 넘게 써야 분량을 뽑는다.

 

그래서 대부분은 5분 말하기를 꺼려했다. 내용도 역시나 천편일률적이었다. 어제 본 TV 이야기, 지난 주말 가족과 공원에 놀러간 이야기, 도덕 교과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우리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 돼야 한다는 뻔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사랑의 힘을 느꼈나보다. 뻔한 학생들과 같아지는 내용을 말하는 것은 짝사랑의 이름으로 용서할 수 없었다. 결론은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의식적으로 튀려고 했다. (원래 싱크탱커는 튀는 성격은 아니다.) 그런데 너무 원고 내용을 고민하다가 발표 전날 그대로 잠이 들어버리는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

 

등교하기 몇 시간 전인 새벽 아침에 나는 무엇에 홀린 듯 갑자기 일어났다. 5분 말하기를 위한 원고는 백지 상태였다. 그때 나를 잠에서 깨운 꿈이 생생하게 눈앞에서 펼쳐졌다. 그날 밤 나는 악몽을 꾸었다. 입에서 빨간 피를 흘리며 날카로운 칼을 손에 쥔 어떤 남자가 이유 없이 나를 죽이기 위해 쫓아왔다.

 

나는 이 꿈의 내용을 모티브로 5분 말하기 원고를 순식간에 써내려갔다. 특별히 원고를 외울 필요도 없을 정도로 이미 머릿속에 전체적인 내용이 입력됐다. 마침내 발표 시간이 왔다.

 

과감하게 나는 5분 말하기의 포문을 아래와 같이 열었다.

 

 

남자의 입에서 빨간 피가 흘렀다. 나는 이유도 모른 채 달렸다. 남자의 손에는 날카로운 칼이 있었다.”

 

애석하게도 이후의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첫 문장은 분명히 그렇게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여곡절 끝에 말하기가 끝났다.

 

발표가 끝나고 3초간 정적이 흘렀다. 완벽한 파격이었다. 갑자기 화자인 나를 칼로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피 흘리는 남자를 반말로 건조하게 반 친구들에게 마구 던졌으니, 평온하고 착한 주말 대공원을 기대한 이들에게는 쇼킹이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 모두 박수.”

 

선생님이 갑자기 학생들에게 나에게 박수를 치라고 하신 것이다. 몽환적 상태에서 아침에 급조한 나의 원고, 나의 언어, 나의 말이 박수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공개적으로 나에게 한마디를 했다.

 

“OOO는 애늙은이야~”

 

나는 졸지에 애늙은이가 됐다.

 

 

싱크탱커는 왜 애늙은이가 됐을까. 왜 그때의 언어가 박수를 받았을까.

 

그 이유에 대해 성인이 되고 생각을 해봤다. 어렴풋이 당시에 내가 쓴 언어가 선생님과 친구들의 머릿속에 모종의 어떤 그림을 그려준 것이 아닐까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 느낌은 어떤 언어가 어떻게 그림을 그려 준 것일까에 미쳤다.

 

내가 내린 결론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언어를 썼다는 것에 모아졌다. ‘빨간 피를 입에서 흘리는 남자’, ‘그 손에 쥐어진 날카로운 칼’, 그리고 무작정 그를 피해 달려가는 나는 하나의 이미지를 그려준 살아있는 언어가 됐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더 지나고 살아있는 언어가 좋은 글쓰기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은 작가 이외수의 저서 <글쓰기 공중부양>에 나오는 생어(生語)와 사어(死語)의 개념으로 더욱 구체화됐다. 이외수가 말한 생어는 말 그대로 살아있는 언어, 사어는 죽어있는 언어였다. 사람들의 오감에 직접적인 이미지와 감정의 파장을 만들어내는 것이 생어이다.

 

생어와 사어의 개념은 기본적으로 많은 한국어가 한자어에 바탕이 됐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정말로 그렇다. 한자는 추상적이며 관념적이다. 그래서 머릿속에서 한 번 더 찰나의 순간 뇌의 회로를 연결해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반면 한글은 대부분 김태희의 얼굴이다. 보자마자 저 여자가 미녀라는 것을 즉각적으로 알 수 있게 만든다. 언어가 발현되는 시간과 생각할 시간이 거의 동시적이다. 세종대왕은 그래서 위대하다.

 

기본적으로 한자는 움직이지 않는 정착의 언어이다. 최근에 방송되고 있는 <이어령의 100년 서재>에서 이어령 선생도 한자는 한 곳에 정착한 사람들이 만든 농경적 문화의 산물, 토포필리아(TopoPhilia)의 연장선으로 봤다. 그래서 글쓰기와 화법에서 남용된 정착어 한자는 사람들의 가슴에 역동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사실은 생어와 사어의 개념은 좋은 글쓰기를 넘어 창의성 글쓰기와 화법에도 핵심적인 인자가 된다는 것을 최근에 자주 실감한다.

 

생어를 자주 쓰는 사람은 언어의 전달 효과와 파생 효과를 빈번하게 일으키는 사람이다. 생어를 통해 직접적으로 빠르게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은 사람들에게 오랜 기억을 만들며, 추가적으로 언어의 동적 기능을 통해 다양한 연결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창의성 발현에 도움이 안 될 수가 없다.

 

 

그 예를 다음 4개의 문장에서 살펴보겠다.

 

<1>

그놈은 흉기로 자주 자해를 하는 습관이 있다. (사어)

그놈은 뻑하면 회칼로 자기 배를 그어대는 습관이 있다. (생어)

 

이외수가 예시로 든 표현이다. 아래의 생어 문장이 보다 확실하게 미친놈이라는 강한 인상을 심어준다. 자해(自害)라는 추상적 한자보다 자기 배를 뻑하면 그어대는 특정된 행위의 언어가 사람들의 눈살을 보다 더 찌푸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2>

여기가 무슨 군대입니까. 무슨 당론이면 주장의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고 잘못된 의견도 모두 수용해야 합니까?” (사어)

여기가 무슨 군대입니까. 무슨 당론이면 똥이든 된장이든 주는 대로 다 받아먹어요? 똥인데?” (생어)

 

아래의 문장은 드라마 <어셈블리>에서 정현민 작가가 쓴 대사이다. 지난 포스팅에서 이미 <어셈블리> 명대사로 소개한 적이 있다. 사실은 생어였다. 만약 앞 문장처럼 정재영이 말했다면 장면의 재미와 집중도는 현저하게 떨어졌을 것이다.

 

시시비비(是是非非)라는 괴상한 모양을 한 이 언어는 뭔가.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는 뜻이다. 일상에서 종종 쓰인다. 하지만 죽은 언어이다. 복잡하다. 가볍게 똥이든 된장이든으로 치환이 가능하다. 똥과 된장은 언어를 보자마자 누구라도 시각과 미각을 0.1초 만에 확 환기시킨다.

 

잘못된 의견을 수용(受容)한다? 말이 어렵다. 정현민 작가는 똥을 먹는다고 표현했다. 이건 구역질이 나는 만행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짓은 절대로 해선 안 된다는 것을 빠르게 알게 된다. 이런 게 생어다.

 

 

(사진 출처 및 권리= StephenKing.com)

 

생어와 사어 개념은 이외수만 주장한 것이 아니다. 일찍이 이야기의 마술사스티븐 킹도 2001년 자신의 저서 ‘<On Writing> (국내 번역본 <유혹하는 글쓰기>)’을 통해 살아있는 언어의 중요성을 똑같이 강조했다.

 

<3>

존은 하던 일을 멈추고 생리 현상을 해결했다. (사어)

존은 하던 일을 멈추고 똥을 누었다. (생어)

 

스티븐 킹이 이 책에서 든 간단한 예시이다. 킹은 글쓰기에서 정말 심각한 잘못은 낱말을 화려하게 치장하려고 하는 것으로, 쉬운 말을 쓰면 어쩐지 좀 창피하게 느껴질 것 같다는 자기검열을 사어의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공교롭게 똥이 또 등장했는데, 똥이나 피처럼 자극적인 언어를 쓰라는 것이 아니다. 킹은 이에 대해 중요한 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굳이 천박하게 말하라는 게 아니라 평이하고 직설적인 표현을 쓰라는 것이다.” 생어가 그렇다. 평이하고 직설적이다. 반대로 어렵고 함축적인 언어를 사람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4>

남자는 한편으론 기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슬퍼 보이는 감정을 복합적으로 표현했다. (사어)

남자는 한눈으론 웃고, 한눈으론 울고 있었다. (생어)

 

아래의 생어는 싱크탱커가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하는 천재 작가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에 나오는 문장이다. 문장이 너무 멋있어 외우고 있는 문장이기도 하다. 전형적인 살아있는 언어로 쓰인 문장이다. 인간의 감정은 복합적이다. 하나의 얼굴에 나오기도 한다. 이것을 어떻게 표현할까. 김승옥은 한쪽 눈에는 웃음, 다른 눈에는 울음으로 아주 쉽게 감정을 결합했다.

 

사람이 한 눈으로 울고, 동시에 한 눈으로 웃을 수 있을까. 이건 말이 안 되는 행동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얼굴이 강하게 심상으로 남는다. 간단한 문장이지만 매우 위력적이다. 그래서 김승옥의 이 문장을 보고 나는 남자의 얼굴과 감정을 즉각적으로 상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구나 굳이 이외수나 스티븐 킹이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장래희망이 아니라면 작가가 될 이유나 필요도 사실은 없다. 그러나 누구나 살면서 글쓰기를 한다. 작가가 꼭 책을 출판하는 사람으로 해석하면 좁게 해석한 것이다. 작가는 모든 곳에서의 크리에이터와 동의어다.

 

그래서 당신이 어떤 자리에 있든 글을 쓰고 생각을 표현하고 대중 앞에서 말을 할 상황은 광의의 작가처럼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때 살아있는 언어, 생어를 떠올려보자. 조금은 생각의 회로가 창의적 언어로 열리게 됨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의식하며 실행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부끄럽게도 사실은 글을 이렇게 쓴 나 역시 늘 부족함을 느낀다. 그러나 하다보면 나아질 것이라는 하얀 희망을 품게 된다.

 

한 가지 주의점도 있다. 사어는 생어의 하위개념만 되는 것은 아니다. 글쓰기 고수들은 생어만 쓴다고 반드시 좋은 글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사어도 글의 성격과 분위기에 맞게 적절히 녹여 쓸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다시 중학교 수업 시간으로 돌아가겠다. 내가 만약 그때 입에서 빨간 피가 흐르는이 유치한 언어로 치장된 남자를 등장시키지 않았다면 나는 짝사랑 국어 선생님으로부터 박수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땐 그것이 살아있는 언어인 줄 몰랐다. 하지만 그 유치한 언어가, 창의성 언어인 생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만큼은 나는 운 좋게도 일찍이 알아차렸는지도 모른다. 혹시나 확정적 인식이었다면 정말로 나는 애늙은이였을까. 문득 그 시절 선생님이 다시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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