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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 창조적 글쓰기

이승엽 400홈런과 우즈, 서승화...스타의 압박감

 

(사진 출처 및 권리: 이승엽 월페이퍼, 삼성 라이온즈)

 

[타이론 우즈에게 겪은 패배가 이승엽에게 준 교훈]

[400호 홈런 가운데 매우 특별했던 서승화와의 대결]

 

그는 그라운드를 돌면서 홈베이스까지 어떠한 세리머니도 하지 않았다.

 

구승민(롯데 자이언츠)을 상대로 쳐낸 KBO리그 400번째 홈런이었다.

 

원래 홈런 이후 과한 동작을 하지 않았던 이승엽이었지만, 400홈런이 나왔던 이날은 극적인 홈런을 때렸을 때 가끔씩 주먹을 불끈 쥐었던 조금의 행동조차 하지 않았다. 담담하게 그라운드의 다이아몬드만 천천히 돌았다. 발걸음이 무척 편해보였다. 할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평범한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기념행사가 끝나고 인터뷰에서 그는 만감이 교차한다는 한마디를 꺼냈다.

 

이승엽의 만감에는 20년 넘게 선수 생활을 하며 환희 뒤에 가려진 수많은 번뇌와 고통, 어려움이 녹아있을 것이다. 만감의 감정 속에는 타이론 우즈(전 두산 베어스)와 서승화(LG 트윈스)라는 두 개의 이름도 포함돼 있다. 우즈와 서승화는 400호 홈런 과정에서 대표적으로 이승엽에게 강한 압박을 가했던 선수였다.

 

좋은 타자와 그렇지 않은 선수를 가리는 기준은 실력이다. 그러나 좋은 선수와 스타를 가리는 기준은 마음의 압박·부담감을 이기는 힘이다. 승부의 갈림길에서 반드시 여기서 해내야 한다는 마음의 압박감을 이겨 낼 때 대선수가 되고 국민타자가 된다.

 

이승엽이 처음부터 스타는 아니었다. 마음의 압박감에 스스로 무너졌던 나약하고 어린 타자였다. 그는 1997년 첫 홈런왕(32)에 올랐다. 이듬해인 1998년도 8월말까지 36홈런을 기록하고 있었다. 한 시즌 최다홈런 기록 수립의 기대가 걸렸고 2위인 우즈(29)보다 7개나 많았다. 2년 연속 홈런왕은 큰 문제가 없어보였다.

 

이승엽은 그 시점부터 무너졌다. 상대 팀들의 집중 견제와 우즈의 맹추격에 대한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했다. 결국 이승엽은 8월 말 이후 2개의 홈런만 추가하는데 그쳐 홈런 레이스에서 우즈(42)에게 역전패 했다. 그가 프로생활에서 처음 겪어 보는 실패의 큰 쓴잔이었다. 22살의 이승엽은 그때를 절대로 잊지 못한다고 했다.

 

마이크 스태들러는 <야구의 심리학>에서 자기 초점화를 언급했다. 선수가 실패에 대한 압박감속에서 매일같이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때 무의식적으로 그 믿음에 대항하려고 애쓰게 되고, 추가적으로 팬들과 언론의 가중된 관심으로 스스로의 심리 상태를 극복하지 못해 정상 플레이를 망치게 된다. ‘1998년의 이승엽이 그랬다.

 

이승엽이 1998년에 겪었던 자기 초점화의 벽을 이후 극복하지 못했다면 그저 그런 야구 잘하는 선수로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극복해냈다. 이듬해 홈런·타점 등 5개 타이틀과 MVP를 모조리 거머쥐었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5년간 4차례 홈런왕에 오르며 경쟁자들을 압도했다.

 

우즈 이외에 부담감을 이겼던 이승엽의 만감에 추가될 수 있는 이름이 투수 서승화다.

 

(사진 출처: 삼성 라이온즈, SBS, KBO)

 

이승엽이 2003822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서승화로부터 뽑아낸 홈런에는 많은 의미가 있었다. 정규시즌 400호 홈런 가운데 매우 특별했으며, 이승엽도 2012년 SBS <힐링캠프>에 출연해 당시의 홈런이 가장 기분 좋고 통쾌했다고 기억했다.

 

그 승부에는 남자들의 자존심이 녹아 있었다. 반드시 이겨야 하는 기싸움이었고 투수와 타자의 대결이었다. 스토리 라인이 있었다. 홈런 이전에 이승엽과 서승화는 같은 해 89일 난투극을 벌였다. 이승엽이 선수생활하면서 처음으로 보여준 주먹다짐이었다.

 

822일 둘은 운명처럼 다시 만났다. LG 감독 이광환은 삼성이 4-0으로 앞선 4회초 21,2루 이승엽 타석에서 공교롭게도 서승화를 마운드에 올렸다.

 

멋진 투수 교체였고 멋진 승부였다. 이승엽과 서승화는 주먹질 대신 정정당당한 승부를 펼쳤다. 서승화는 볼카운트는 3-2 풀카운트에서 도망가지 않았다. 남자답게 146짜리 낮은 직구를 던졌고 효과적인 투구였다. 하지만 만약 이 승부에서 이승엽이 삼진을 당했다면 그것은 '이승엽의 게임'이 아니다. 그는 잠실구장 백스크린을 때리는 135m짜리 중월 스리런 홈런을 쏘아 올렸다.

 

이승엽은 난투극으로부터 이어진 싸움에서 그라운드에서 실력으로 상대를 압도했다. 이승엽의 경력에 중요한 홈런이었다. 2003년 서승화로부터 뽑아낸 이 하나의 홈런이 56개의 시즌 홈런에 추가될 수 없었다면 같은 해 아시아홈런 신기록도 없었을지 모른다.

 

(사진 출처 및 권리: SBS, KBO, EDIT By ThinkTanker)

 

이승엽에게 왼손 투수서승화는 야구의 고정 관념이었다. 왼손 타자가 왼손 투수에 약하다는 것은 야구의 통설이다. 이승엽이 마주했던 승부의 길목에는 수없이 많은 왼손 투수가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는 넘어섰다.

 

2003년 이승엽은 8월말까지 서승화를 상대로 통산 11타수 6안타 2홈런을 기록했다. 정규시즌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이승엽의 결정적인 피홈런 투수인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의 이상훈, 2006WBC20승 투수 돈트렐 윌리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의 이와세 히토키 모두 왼손 투수였다.

 

심리학자 클로드 스틸과 조슈아 아론슨은 특정한 능력에 관하여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생기면 관련 상황에 직면시 무의식적으로 고정관념이 떠올라 압박감을 느끼게 돼, 한 번의 실패가 또 다른 실패의 고정관념을 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승엽은 400호 홈런 과정에서 왼손투수라는 이같은 고정관념의 압박(Stereotype Threat)’을 연달아 슬기롭게 넘어섰다.

 

이승엽은 최근 400호 홈런을 앞두고 미디어를 통해 언제나 자신감은 갖지만 자만감은 갖지 말자고 다짐한다고 말했다.

 

자신감과 자만의 개념은 구별된다. 자신감이란 작용하지 않는 지식을 가지고도 계획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다. 자만이란 자신을 믿되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다.

 

그는 프로입단 초기 주전으로만 뛰어도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작용하지 않는 불안한 능력의 선수였다. 그러나 혼이 담긴 노력이라는 준비의 방법론을 통해 훌륭한 선수가 되겠다는 계획은 자신감을 만들었고 승부의 고비를 넘어서는 힘이 됐다.

 

이승엽은 그렇게 그를 위협한 수없이 많은 부담과 압박감을 이기며 400번째 홈런을 때려냈고 한국 프로야구의 전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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