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어셈블리 공식 포스터)
[정현민 작가의 드라마가 가치 있는 이유]
작가가 언어를 드러내거나 자랑하기 위해 언어를 남용하면 드라마가 어색해진다.
‘언어의 마술사’ 김은숙 작가처럼 처음부터 능수능란한 언어로 마술을 부리며 극 전체를 끌어가면 괜찮다. 하지만 작가가 자신의 설익거나 괴리감을 주는 언어를 화면을 통해 어설프게 뽐내는 순간 그 드라마는 싸구려가 된다. 한 발 더 나아가면 그 유명한 막장 드라마가 된다.
5년 전 봤던 그 드라마는 이와는 다르게 품격이 있었다. 작가가 쓰는 언어가 너무나 멋지고 훌륭해 드라마 한 회를 보면 좋은 책 한 권을 읽는 느낌마저 주었던 드라마였다. 그 드라마의 작가는 매우 공을 들여 대본을 만드는 것 같았다. 한 글자, 한 글자 허투루 언어를 남용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감정에 직접적인 파장을 만들고 있었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문장이 대표적이다.
“한 번은 실수일지 몰라도 두 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그건 실력이 된다. 아버진 니가 그런 실수를 실력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앞에 쓰인 “한 번 실수는 실수지만 반복된 실수는 실력이다”는 사실 아주 특별한 문장은 아니다. 종종 일상에서도 쓰이는 평범한 문장이다. 그러나 지금 이 문장은 아버지가 실수를 한 아들을 향해 조언을 하는 장면에 쓰인 거대한 전제이자 작자가 다음 언어를 위해 쓴 효과적 장치이다. 두 번째 문장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자신이 쓴 첫 문장을 그대로 다시 받아 “그렇게 반복된 실수를 실력이 되지 않게 하라”는 짧지만 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아버지가 나지막하게 말하는 이 순간 아들은 왠지 앞으로 반복된 실수를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같은 실수를 하는 아들은 스스로 실력 없는 아들임을 아버지에게 인정하게 되는 것 같아 그렇게 되기가 매우 싫어진다. 최소한 지각 있는 아들이라면 아버지의 이 말을 듣고 실수를 실력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평범해 보였던 첫 문장이 위력을 발휘하며 두 번째 문장까지 같이 살려준다. 작가는 이처럼 아주 쉬운 장치를 대사에 썼지만 대사에 힘이 실리며 동시에 드라마 화면도 멋지게 옷을 갈아입는다. 어찌 이 대사가 실수한 아들에게만 해당되는 조언일까. 작가가 만든 언어는 반복된 실수를 하는 누구나에게 해당될 수 있는 범용적 언어다. 언어는 쉽게 썼다. 그런데 인간의 감정에 직접적인 파장을 만든다. 이런 게 진정한 명대사이다.
이 대사가 나온 ‘그 드라마’는 <프레지던트>였다.
(사진= KBS)
주인공 장일준(최수종 분)의 경선과정부터 대통령이 되기까지 이야기를 그린 정치 드라마로 카와구치 카이지의 ‘이글(Eagle)’을 원작으로 했다. 훌륭한 연기를 보인 주인공 최수종이 언급한 아들에게 한 조언 말고도 명대사는 넘치고 넘쳤다. 그러나 <프레지던트>는 실패했다. 동시간대 경쟁작에 시청률 게임에서 밀렸다.
그러나 싱크탱커는 이렇게 뛰어난 드라마의 언어를 창조한 작가의 이름을 잊을 수 없었다. 작가의 이름은 정.현.민.이었다.
이후 그의 이름은 대중들에게 잊혀졌다. 다소 아쉬웠다. 2008년 방영됐던 SBS 드라마 <온에어>에서 김은숙 작가가 만든 “요즘 시청자들은 주인공 이름뿐만 아니라 작가 이름을 보고 드라마를 고른다”고 말한 대사에 나는 충분히 공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만큼 정현민이라는 이름이 다시 드라마의 극본을 맡는다는 사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2014년 겨울, 나는 당시에 느낀 내 눈과 직감이 그다지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됐다.
그는 ‘결국’ KBS 드라마 <정도전>으로 신드롬을 일으켰다. 사극의 센세이션이었으며, 명대사의 집대성이었다. 방송사의 작품상, 최우수연기상, 작가상 등 각종 시상식에서 11개의 상을 휩쓸었다.
(사진= KBS)
하지만 내게는 매우 새삼스럽고 당연한 결과처럼 느껴졌다. <프레지던트>의 정현민 작가였다면 충분히 <정도전>에서도 정현민 작가가 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프레지던트>를 인상 깊게 보고 기억하시는 분들이라면 충분히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또 한 번 <정도전>의 마지막 회, 마지막 대사에서도 “저마다 가슴에 불가능한 꿈을 꾸어라. 그것이 바로 그대들의 대업, 진정한 대업이다”라는 강력한 언어를 심어놓고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했다. 매우 친해 보이지 않는 언어 ‘불가능’과 ‘꿈’이 어울릴 때 오히려 그것이 대업이 될 수 있다는 착상을 마지막에 외치며 대작 드라마를 끝낸 것은 역시나 크리에이터의 언어였다.
(사진= KBS, 어셈블리 공식 포스터)
정현민 작가는 2015년 또 한 번 드라마 <어셈블리>를 통해 대업을 꿈꾸고 있다.
<미생> 이후 드디어 내게 한 회도 빼놓지 않고 보는 드라마가 생긴 것이다. 다만 <정도전> 때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시청률은 김태희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싱크탱커는 <어셈블리>가 좋다. 그리고 나는 이 드라마를 명품 드라마라고 부르기를 주저 하지 않는다. 정현민 작가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어셈블리>가 특별한 첫 번째 이유는 창의적 관점에서 ‘그레이존’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회색지대인 그레이존은 이어령 선생이 여러 차례 주장한 창의적 시각이다. 회색은 사실 긍정의 색깔은 아니다. 회색하면 떠오르는 것이 회색분자, 박쥐 등의 여기저기 붙어 이익을 취하는 나쁜 이미지다. 그런데 회색은 창조의 색깔로 탈바꿈 될 수 있다. 회색의 인자 A(검정), B(흰색)가 C(회색)를 자유자재로 각도를 변화시켜 의미를 더하거나 증폭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무수한 D, E, F가 탄생할 수 있다.
여러 차례 <창조의 재료탱크>는 ‘애매성’이 창조적 기법의 하나가 된다고 말해왔다. 애매성은 그레이존과 의미가 다르지 않다. 색깔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정보를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늘어나고 변이의 가능성이 증폭된다. 이 과정에서 창조가 발현된다.
정현민 작가는 <어셈블리>에 수많은 ‘그레이 존’을 배치했다. 드라마 설정 자체가 그레이 존을 큰 축으로 한다. 여당인 국민당 안에 친청계(A)와 반청계(B)가 있고 그 사이에 주인공 진상필 의원(정재영 분)이 홀로 존재하는 딴청계(C)가 있다.
인물 진상필은 캐스팅보트를 무기로 그레이 존을 탄생시켰고 스스로 애매한 중간자적 위치를 이용해 정치적 전략을 풀어간다. 진상필 의원의 위치는 애매하지만 존재감과 주장은 강력하고 명확하다. 이런 그레이 존이 주는 재미가 드라마 전편에 흐른다.
그레이 존은 진상필 뿐만 아니다. 드라마 초기에 진상필의 보좌관 최인경(송윤아 분)은 진상필의 정적이자 자신의 대학 선배인 국민당 사무총장 백도현 의원(장현성 분) 쪽에 서있던 사람이었다. 공천을 부탁하기도 했었다. 진상필 의원도 최인경 보좌관의 마음을 오해할 정도로 그녀는 두 명의 남자 사이에서 고민했었다.
옥택연이 연기하는 김규환 비서는 또 어떤가. 그는 극중 사고로 사망한 배달수의 아들로 자신이 모시는 진상필 의원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복수하기 위해 의원실로 취업한다. 그러나 드라마가 거듭할수록 남자 진상필의 매력에 빠져들며 고심한다. 정현민 작가는 이를 아버지의 사망이 주는 ‘오해’의 설정으로 김규환의 마음을 대비해 극을 끌어가는 그레이존으로 활용했다.
10년간 국회 보좌관으로 일했던 정현민 작가의 경험이 정치 드라마, 그리고 정치를 이루는 배경을 시청자들에게 디테일하게 제공하는 것도 <어셈블리>의 강점이다. 극중에 김규환 비서가 최인경 보좌관의 지시에 따라 국회를 수십 바퀴 뛰는 얼차려를 받는다. 추측컨대 이것은 작가의 실제 경험담이나 목격담은 아니었을까. 좀처럼 보기 힘든 특별한 얼차려 장면에 눈길이 갔다.
<공공의 적> 등 주로 영화에서 부러지지 않는 직선을 연기했던 정재영의 캐릭터는 <어셈블리>에서도 그대로 유효하다. 조용한 카리스마를 연기하는 장현성, 정도전의 이인임을 연상시키는 베테랑 박영규는 악의 세력에도 기품을 더한다.
명대사는 이미 많이 쏟아졌다. 아래의 명대사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생략하겠다. 이런 언어들은 자신이 사용하기에 따라 여러 가지에 응용 가능한 훌륭한 교재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을 정계에 끌어들였다.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끝까지 거절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것이 인간이 권력과 사귀는 방식이야.”
“인생과 정치는 정답이 없고 선택만 있다. 그 선택을 정답으로 만드는 것이 인생이고 정치다.”
“난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사람의 욕심을 믿죠. 욕심을 통해 그 사람의 행동을 예측하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런 깊이 있는 대사뿐만 아니라 <어셈블리>에는 위트가 돋보이는 코믹한 대사도 뇌세포를 자극한다.
“여보세요! 무슨 당이요? 뭐 봉숭아 학당이요? 맹구세요?”
“내가 친청계의 허수아비면 당신은 반청계의 아바타냐? 아바타 영화를 보기는 봤나? 못 봤겠지. 아주 접대 받고 쳐 노시느라고.”
“여기가 무슨 군대입니까? 당론이면 뭐 똥이든 된장이든 주는 대로 다 받아먹어요? 똥인데?”
(사진= KBS)
<어셈블리>는 정치드라마이자 약자가 주인공인 드라마이다. 그러나 인생에도 정치적 선택과 결단을 해야 하는 일이 발생하며 언제나 강자만으로 살 수는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때 주인공 진상필 의원의 행동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특히 지난 13일 방영된 10회에서 진상필 의원이 자신의 지역구인 경제시의 신항만 건설에 반대하는 논리를 펴는 연설은 그 어떤 정치인의 연설보다도 매우 감동적이자 전략적이었다.
연설 중간 현장에서 진상필 의원에 반대하는 사람이 갑자기 일어서서 “지금 그것이 지역구 의원이 할 소리입니까”라고 방해한다. 그때 당신이 진상필 의원이라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그는 아래와 같이 말했고 이 연설은 그대로 타이핑해서 보관하고 싶을 만큼 훌륭한 언어였다. 연설 호흡과 시간을 조절하며 멋진 연기를 선보인 정재영과 대사를 만든 정현민 작가가 탄생시킨 근래에 보기 드문 드라마 속 명장면이었다.
“여보세요! 저 시의원 아닙니다. 저 구의원 아닙니다. 국민들 전체를 생각해야 되는... 그런 국회의원입니다. (중략) 국회의원 처음 되면요. 처음 돼서 하는 선서가 있는데, 거기 뭐라고 써져 있냐면... 국민의 자유와! 복리증진! 국가의 이익에 우선!... 양심! 이 3가지가 골자예요.
저요. 지역 이기주의에 앞장서는 그런 영업사원 아닙니다. 저요!! 나라 전체와 국민을 함께 생각하는...그런 진짜 국회의원! 저요!!! 정말 국민들한테 떳떳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그런... ...진짜 국회의원이 되고 싶습니다.”
완벽한 역발상이었다. 지역구 국회의원이 갑자기 대한민국 전체의 이익을 내걸며 감동을 입혀 연설을 하고 있다. 이 연설을 막거나 방해하는 자는 대한민국의 국민이 아니다. 매우 치졸한 사람이 된다. 개별 각론에 얽매여 논리 전개가 안 될 때 총론의 큰 그림을 보면 이렇게 의외의 반전이 나올 수 있다.
정현민 작가는 극 중 송윤아를 통해 플라톤의 명언을 드라마에 삽입하기도 했다.
“정치를 외면한 대가는 가장 저질스런 사람들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정치를 몰라도 전혀 문제없다. 플라톤과 달리 현실에서 정치를 외면해도 그렇게 저질스런 사람들의 지배를 받는 느낌까지는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내가 <어셈블리> 같은 명품 드라마를 외면한 대가는 어쩌면 가장 저질스런 막장 드라마들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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