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이하 모든 사진 <이미테이션 게임> 공식홈페이지)
[암호 해독...그리고 파생된 관계의 의미] (※스포일러 포함)
대략 이런 대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You will never understand the importance of what I am creating here!”
“당신들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앨런 튜링(베네딕트 컴버배치 분)은 영화 중반 자신을 감시하러 온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그리고 이 대사에는 이 블로그 <창조의 재료탱크>가 매우 좋아하는 단어 ‘크리에이팅(Creating)’이 등장한다.
<이미테이션 게임>은 영화의 구성으로만 보면 비슷한 천재 수학자 존 내시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뷰티풀 게임>에 비해 감동의 크기가 많이 약했다. 튜링이 보여준 천재적인 역량이 크게 부각되지 못했고, 암호 해독의 극적 구체성과 방법론에 대한 묘사가 부족했다.
하지만 <이미테이션 게임>의 진정한 강점은 튜링이 주인공으로 다루어졌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 41세의 짧은 삶을 살다간 튜링이었지만 그의 인생은 암호 해독 기계를 만들었다는 점만으로도 크리에이터라 충분히 부를 만한 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영화적 역량을 차치하고라도 창조적 관점에서 효과적인 창의성 기법에 또 하나의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미테이션 게임>의 핵심 키워드는 ‘관계’다.
관계1...암호와 해독
A라는 암호는 B라는 숨은 규칙성과 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다면 B의 규칙성을 알 수 있는 C라는 방법을 매개로 암호A와 규칙성B의 관계를 찾는 것이 해독이다. “해독된 메시지 사이의 관계가 눈길을 끌었어요. 그 어떤 문자도 스스로 암호화 될 수는 없죠.” 영화 속 조안 클라크의 대사처럼 암호는 반드시 대상과 관계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통신 암호문을 다루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나 튜링처럼 학창 시절 친구들끼리만 아는 문자로 쪽지를 주고 받아본 적이 있다면 암호는 절대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음을 떠올릴 것이다.
실제로 싱크탱커는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 암호를 만든 적이 있었다. 유년기에 읽은 애드가 앨런 포우의 소설 <황금충>에 등장하는 암호문이 멋져 보인 것이 발단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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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충의 이 암호는 영어에 자주 등장하는 알파벳의 빈도수를 바탕으로 특정 규칙성을 찾아 문장을 완성하는 것이 해독의 열쇠였다. 그래서 이것을 차용해 내가 단짝과 만들었던 암호의 특정 규칙이 <4839의 법칙>이었다.
창판츄의이미마다성가다도나따선생악가우끝산초다니타드토끝그라디니나쿠뉴다라니이순신고칼춘곤놀증이어머누나아도리자끝무한캐나다와서음점식점아달주이고니개나리다폭운음와서가노래
이 법칙은 문장 시작 이후 순차적으로 4번째, 8번째, 3번째, 9번째의 글자만 전달하고 싶은 진짜 문자로 구성된다. 그래서 위에 쓴 암호문을 4-8-3-9로 교대로 따라가면 ‘이따가 끝나고 놀자’라는 숨은 문장이 드러난다. <4839의 법칙>은 독일의 에니그마처럼 규칙이 변했다. 어제는 4839, 내일은 5932, 다음 주는 9236이 될 수 있었다.
튜링 역시 에니그마의 암호에 숨어있는 규칙성을 찾는 것에 모든 힘을 기울였다. 영화에서는 우연히 조안 클라크의 지인과 술집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 독일 라디오에서 나오는 메시지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다소 작위적인 설정을 했다. 해독의 핵심은 반복되는 단어, 예측 가능한 단어를 영화 속 해독기계 ‘크리스토퍼’의 설정으로 집어넣어 경우의 수를 대폭 줄인 것에 있었다.
내가 만든 <4839의 법칙>에서 4가 비, 8이 히틀러, 나치즘이 3이라는 사실을 미리 기계가 걸러낼 수 있다면 마지막 ‘9’를 찾는 작업은 쉬운 것과 비슷한 방법이다. 실제로 튜링은 독일의 암호문에 쓰인 특정 숫자가 단어들로 입력된다는 것을 알아냈고, 이것을 통해 완성된 문장의 뜻까지 최종적으로 풀어낼 수 있었다.
관계2...기계와 인간의 두뇌
영화 제목에 쓰인 ‘이미테이션(imitation)’ 이라는 단어에도 역시 ‘관계’가 녹아있다. 대상 없는 모방은 없다. 튜링은 인간의 두뇌를 모방한 기계를 만들고 싶어 했다. 영화에서 튜링은 “기계는 사람의 방식대로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단지 어떤 것이 당신과 다르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것이 생각하지 않는다고 봐야할까?”라는 매우 철학적인 화두를 던진다.
그래서 구리, 전선, 철로 이루어진 뇌가 기계인지 인간의 뇌인지를 알아보자는 게임을 제안한다. 그 게임이 영화 제목 <이미테이션 게임>이다. 튜링이 크리에이터인 이유는 이 하나의 관계 설정에 일생의 모든 것을 바쳤다는 점이다. '기계와 인간의 뇌'라는 관계를 설정했고, 관계를 밝혔고, 인류를 컴퓨터 시대로 이끄는 관계를 파생시켰다.
‘훌륭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쳐온다’는 파블로 피카소의 유명한 명언은 원래 위대한 예술가의 훔쳐옴에 초점이 맞추어진 말이다. 그러나 앞에 쓰인 말, 모방을 잘하는 예술가도 훌륭하다는 사실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튜링이 모방을 잘했기에 이후 튜링을 존경하고 피카소의 이 말을 자주 인용했던 스티브 잡스 같은 무수한 훔쳐오는 위대한 창조자들을 탄생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관계3...선택
관계없는 선택은 없다. 선택에는 반드시 2가지 이상의 선택 대상이 있게 마련이다. 영화에도 허구를 소재로 선택의 문제가 등장한다. 독일의 암호체계를 알아낸 상황에서 연구팀 동료의 형이 죽음에 이르는 위기를 그린 장면이다. 튜링은 이 장면에서 자신들이 알아낸 암호 해독의 관계를 들키지 않기 위해 동료의 형이 타고 있던 전함의 침몰 예정 사실을 알고도 묵인하는 어려운 ‘선택’을 한다.
감독의 이 설정은 튜링의 업적을 마지막에 부각시키는 역할을 했다. 윤리적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암호 해독의 비밀을 숨겨 스탈린그라드 전투,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 전쟁의 승리 뒤에 튜링의 정보가 있었음을 알리고, 결국 소수의 생명 대신 1,400만 명의 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감독은 튜링이 “매일 연구팀은 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를 결정했다”는 인간적 고뇌를 그리며 선택의 문제를 다시 환기시켰다.
튜링의 동성애적 성 정체성도 선택의 문제로 표현됐다. 실제로 약혼까지 했던 조안 클라크를 앞두고 튜링은 커밍아웃을 통해 자신의 성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결혼을 포기했던 선택이 죽음에까지 이르는 인과 관계의 한 요소가 될 수 있었음을 영화는 암시했다.
관계의 기본 요소는 A와 B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많은 창조적 결과물은 합성이라는 창의성 기법을 사용한다. 합성은 A와 B라는 최소의 관계에서 시작한다. 이상에서 언급한 ‘관계의 코드’를 사용한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그래서 볼 가치가 충분한 영화였다. 물론, 인류 역사를 바꾼 ‘기계와 인간의 뇌’라는 중요하고도 어려운 관계 설정으로 고뇌하다 죽어간 한 천재의 일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By ThinkTanker
<BOX> ‘하이퍼텍스트’ 영화적 기법의 명암
<이미테이션 게임>은 영화적 기법으로 ‘크리스토퍼’라는 하이퍼텍스트를 다양하게 활용했다. 크리스토퍼 모컴은 실제로 튜링이 어린 시절 만난 수학적 재능이 뛰어난 친구의 실명이다. 크리스토퍼가 사망하자 그의 뇌에 있던 지능을 저장하기 위한 방법을 고안하다 해독 기계의 이론을 만들 수 있었다.
이를 이용해 감독은 어린 시절 크리스토퍼를 좋아했던 튜링의 동성애적 코드를 연결하고, 실제 해독기계의 이름(1940년에 개발한 봄브(Bombe)였고, 여기서 쓰인 알고리즘이 3년 뒤 콜로서스(Colossus)의 기술적 기반으로 이어진다)까지 크리스토퍼로 바꿔가며 연결성을 유지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동성애로 인한 좌절과 파국 속 에서도 먼지 묻은 기계 크리스토퍼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며 ‘친구 크리스토퍼’와 ‘기계 크리스토퍼’를 감성적으로 오버랩 시키는 하이퍼텍스트의 절묘한 합성을 보여줬다.
그러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생각지도 못한 누군가)이,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을 해낸다”(Sometimes it is the people who no one imagines anything of who do the things that no one can imagine)는 대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끼워 넣기였다. 결코 명대사가 아니다. 처음에 어린 시절 크리스토퍼가 튜링을 위로하기 위해 쓰였을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중간에는 튜링의 입에서, 마지막 장면까지 조안 클라크를 통해 등장할 때는 정말 손발까지 오그라들었다.
튜링이라는 천재를 영화 안에 설정해 놓은 상태에서 천재성을 부각시켜도 모자란 구성이었는데, 감독 스스로 튜링을 다시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 비유해놓고 영화의 중요 장면마다 이 말을 썼다. 이 말이 어울리는 영화가 되려면 뭔가 역량이 부족한 사람이 역경을 딛고 성공한다는 전형적인 주인공이 등장해야 한다. 동성애로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되는 것은 더욱 아닐 것이다. 이 대사의 주어가 잘못 적용된 것이다.
튜링은 여기에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다. 비범한 수학적 능력을 보여준 조안 클라크를 비롯해, 우수한 두뇌집단으로 국가적 비밀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연구팀도 이 대사의 주어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다. 튜링을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로 규정 하는 것 자체가 혁명적 사고를 해냈던 튜링의 이미지를 약화시켜 ‘이미테이션 게임’이라는 영화 전체의 흐름과 어울리지는 않는 옷이 됐다. 이 대사는 차라리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튜링의 창의성 측면)이, 아무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생각을 결국 이루어낸다”로 바꾸는 것이 적절하지 않았을까.
감독 모튼 틸덤은 크리스토퍼라는 극적인 결과물의 탄생 과정과 역사적으로는 대중들에게 가려졌던 ‘인간 튜링’의 비애와 고뇌를 표현하기 위한 연상 작용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연상은 됐다. 하지만 납득은 가지 않고 실소가 나왔다. 이야말로 하이퍼텍스트, 아니 잘못된 하이퍼센텐스(Hypersentence)의 완벽한 예시였다. 옥의 조금 큰 티였다. By ThinkTanker (creationthinktank.tistory.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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