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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 창조적 글쓰기

김광현 빈 글러브...그는 사기꾼이 아니다

 

(사진 출처 및 권리= KBSNSPORTS, KBO)

 

[야구의 몸은 기억한다]

[구별해야 할 스포츠의 양심선언 개념]

 

돌팔매질이 날아오더라도 이번에는 소수설에 서야겠다.

 

체감상 여론은 거의 100%. 김광현을 사기꾼으로 비난하는 사람은 1,000명 가운데 999명이다. 그럼에도 나는 분명히 그 무리에 끼고 싶지 않은 1명이 되고 싶다. 확실히 하자. 독고다이로 괜스레 멋져 보이고 싶다거나 창조적 사고를 빙자하고 싶다는 치기가 아니다. 아닌 건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김광현 빈 글러브 태그가 논란이다.

 

김광현은 9일 대구 삼성전에서 0-0으로 맞선 422루에서 박석민으로부터 내야 뜬 공을 유도해냈다.

 

타구는 3루 라인선상 가까이에 떨어졌다. 투수 김광현을 포함해 3명의 SK 수비진이 동시에 몰려들며 원바운드 된 공을 잡기 위해 동시에 글러브를 뻗었다. 김광현은 달려가던 관성 그대로 글러브를 뻗어 홈으로 들어오던 최형우를 태그했다. 주심은 아웃을 선언했지만 공은 김광현이 아닌 1루수 앤드류 브라운의 글러브에 있었다. 김광현은 경기가 끝난 뒤 사기꾼으로 엄청 곤욕을 치루고 있다.

 

몸은 기억한다

 

투수가 와인드업으로 공을 던진다. 그때 투수는 생각한다. 손을 머리 위에 올리고, 호흡을 1초간 쉰 다음, 키킹하는 발은 복부 아래 13cm까지 올린다. 선동열 감독이 자주 이야기했던 팔각도는 최대한 크게 유지한다. 릴리스 포인트는 내 몸의 중심에서 28cm까지 뻗어 던진다.

 

타자가 타격을 한다. 그때 타자는 생각한다. 커브가 들어오는 순간이다. 공을 퍼 올려 타격하기 위해 무릎은 7cm 낮춘다. 스윙도 어퍼스윙을 한다. 공이 배트에 맞고 있다. 촉감이 느껴진다. 좌익수 방향으로 보내기 위해 배트를 왼쪽으로 27cm 당긴다. 달려간다. 2루 베이스 앞 3.2m 앞에서 슬라이딩을 한다. 슬라이딩시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은 길게 펼쳐야 한다.

 

이 동작을 머릿속에서 이렇게 순차적, 기계적으로 생각하며 플레이하는 선수는 단언컨대 단 한 명도 없다. 불가능하다. 하지만 야구에서 실제로 나오는 행동이다. 그럼 이 투수와 타자는 생각 없이 플레이하는 선수인가. 아니다. 수없이 많은 시간 땀 흘렸던 연습을 통해 자동적으로 몸에 체득된 행동을 그라운드에서 보여줬을 뿐이다.

 

언급한 투수와 타자의 동작은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머릿속에서 생각할 찰나는 몸으로 보여주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멀리 야구까지 갈 것 없다. 당신이 걸어간다. 그때 오른발과 왼발을 교대로 뻗어 걸어가야 한다고 계획하는 사람은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은 매우 인생을 복잡하게 사는 사람이다. 대부분은 아니다. 걷는 행위는 몸에 체득된 행동이므로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포츠의 모든 동작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몸은 기억한다이다. 주말 골퍼들도 자주 하는 이야기다. 부진을 겪던 싱글 플레이어가 오랜만에 16홀에서 완벽한 온 그린을 하자 주변 사람들이 환호한다. 그때 의기양양하게 대답한다. “몸은 기억을 하는 법이거든!”

 

몸의 기억을 전문적으로 증명한 사람은 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이자 BBC 스포츠 해설자인 메슈사이드다. 그는 자신의 저서 <베스트 플레이어>를 통해 타이거 우즈, 비너스·세레나 윌리엄스 자매, 데이비드 베컴 등 다양한 종목의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들을 인터뷰하고 연구했다.

 

핵심도 몸은 기억한다이다. 몸에 기억된 동작들은 연습 당시는 의식하며 만들어진 동작이지만 실전에서는 의식할 여유가 없다. 세계적 스타와 아닌 선수의 차이는 연습의 시간에서 기억된 훌륭한 동작들을 실전의 시간에서 누가 효과적으로 꺼내어 놓을 수 있느냐의 차이다.

 

탁구선수 마티 라이스만은 탁구대 반대편에 세워놓은 담배 한 개비를 향해 수없이 공을 치는 훈련을 했다. 수많은 실전경험을 통해 몸에 각인된 지식을 경기에서 펼치기 위해서였다. 그가 실제 경기에서 탁구대 끝에 있는 담배 한 개비를 생각했을까. 수많은 시간동안 훈련한 덕분에 테니스 황제로저 페더러는 몸의 잠재적 기억 속에 컴퓨터 스트로크를 코드화시킬 수 있었다.

 

 

모두 자동화된 몸의 기억이 있기에 가능했다.

 

문제가 된 김광현의 빈 글러브 태그 장면을 경기 장면을 수십 번 봤다. 마찬가지였다. 김광현의 태그 동작은 몸의 기억이었다. 공을 글러브에 포구했다고 생각하고 태그하기 위해 손을 퍼올리는 동작까지 걸린 시간은 초시계로 판독하기 힘들 정도로 찰나였다. 그 짧은 순간 김광현이 모두를 속이기 위해 사기의 의도를 가지고 빈 글러브를 태그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게는 코미디이자 넌센스였다.

 

김광현은 수십 년 야구를 했던 선수다. 수비시 주자를 향해 글러브를 주자의 몸에 태그해야 된다는 것은 유소년 야구 때부터 해왔던 동작이다. 관찰력 있는 야구팬이라면 베이스커버를 들어가는 2루수나 유격수가 2루타성 타구를 외야수로부터 포구 받는 즉시 자동적으로 주자가 1루에 머물렀음에도, 주자의 움직임을 확인하지도 않고 2루 베이스 주변 허공을 태그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자가 없는데 왜 이런 동작을 할까. 그들은 절대 바보가 아니다. 태그 동작을 코드화된 몸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김광현의 태그 동작도 다르지 않았다. 주자가 홈베이스로 달려오면 절박하다. 실점을 막아야 한다. 그래서 몸의 기억대로 글러브로 일단 태그 해야 하는 것이다. 사우나에서 불이나면 절박하다. 생명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생존본능으로 알몸이어도 일단 살기위해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

 

김광현보고 양심선언을 하라고?

 

그럼 처음 빈 글러브로 태그한 것을 몰랐다고 치자. 하지만 나중에 알았다면 솔직하게 시인했어야 하지 않을까. 양심선언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양심선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광현은 여전히 사기꾼을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미디어에서는 독일 축구 미로슬라프 클로제가 2012년 자신의 손에 맞고 들어간 골을 심판에게 고백해 득점이 취소된 양심선언을 거론하기도 한다.

 

클로제의 사례는 미담이다. 페어플레이라고 칭송할 만하다. 하지만 클로제가 칭찬받을지언정 모든 스포츠 선수가 반드시 클로제를 따라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성스러운 마음이 있다면 너는 반드시 스님이 되거나 수녀가 되라는것과 똑같은 논리다. 그럴 의무도 없고 사실은 그럴 필요도 없다. 스포츠의 당연한 본질이기 때문이다.

 

물론 스포츠의 본질은 땀 흘리는 노력과 열정, 명승부의 감동이다. 그러나 스포츠의 본질은 속임수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속임수 없는 승리란 없다. 다행스럽게도 속임수는 검은 언어지만 스포츠의 속임수는 전략이란 이름으로 백색 언어가 된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스포츠가 어떠한 속임수 없이 솔직한 승부로만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참 순진한 사람이다. 만약 감독이나 선수가 이런 생각을 품고 있다면 그 감독은 꼴찌 감독, 그 선수는 평생 마이너 선수가 될 것이다.

 

야구에서 변화구가 왜 있나. 타자의 타이밍을 속이기 위해서다. 야구에는 페이크 앤 번트 슬러시라는 용어 자체가 있다. 페이크가 등장한다. 상대 수비수를 속이기 위해서다. 배구에도 페인트가 있다. 테니스에도 드롭샷이 있다. 축구에도 헛다리 집기가 있다. 농구는 말할 것도 없다. 다 속이기 위한 행위이다.

 

 

규칙의 테두리 안에서 정상적인 속이기만 거론한다고? 규칙의 제도권 밖에서도 속이기는 난무한다.

 

야구는 속이기를 100% 규칙으로 규제하는 것은 아니다. 사안에 따라 묵인한다. 심판은 권리위에 잠자는 사람을 보호하지 않는다.

 

3루 주자가 희생플라이를 위해 외야수가 공을 포구하기도 전에 3루 베이스에서 리터치 했다. 거의 1초 이상 먼저 스타트했다. 시즌 전체를 그랬다고 해보자. 상당 부분 이익을 봤다. 심판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 수비수는 문제 삼지 않았다. 이때 3루 주자는 시즌이 끝나고 나는 사실 1초 이상 리터치를 빨리 했다고 양심 선언해야 하나? 이런 바보같은 선수가 있을까. 설사 그 선수가 클로제처럼 고백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그 선수를 절대 비난하지 않는다.

 

어떤 포수가 있다. 완전히 빠지는 볼인데 심판이 스트라이크를 선언한다. 그때 포수가 심판을 향해 대답한다. “심판, 사실 지금 이거 볼인데 스트라이크를 주셨네요이렇게 양심선언 해야 하나? 이런 바보 같은 포수가 있을까.

 

이번에는 극단적인 가정을 한 가지를 해보자. 모두가 기억하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 야구 금메달은 사실 한국의 사기극으로 판명 났다. 이승엽이 양심선언을 했기 때문에 한국의 금메달은 박탈당했다. 마지막 쿠바의 타자 구리엘의 땅볼 타구를 잡아 고영민이 병살타로 연결했다고 생각했는데 1루수 이승엽이 베이스에서 발이 떨어졌다고 양심 선언한 것이다.

 

이후 국민들은 이승엽이 아름다운 양심선언을 했고 페어플레이를 했다고 전 국민적인 환호를 보냈다. 이게 무슨 코미디인가. 그때의 이승엽은 국민 타자가 아니라 국민 바보다. 가정처럼 정말로 만약 이승엽이 1루 베이스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평생 숨겼다고 해보자. 그럼 이승엽은 비난받아야 하나?

 

김광현은 자신이 글러브안에 공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속일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했다. 속일 의도가 발현될 시간의 여유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사기꾼으로 욕을 먹고 있다.

 

어떤 초등학생이 귀가 후 자신의 집에 들어와 필통을 열어보니 짝꿍의 연필을 가져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훔칠 의도는 전혀 없이 필통을 챙기다 일어난 사고였다. 학교에서는 연필 도둑이 생겼다며 난리가 났다. 문제가 된 초등학생은 다음날 양심선언을 했다. 이때 양심선언은 어떤 내용이 되어야 할까.

 

나는 모르고 친구의 연필을 가져 왔어요.”

 

이 한마디면 끝난 것이다. 그럼에도 이 초등학생에게 너는 친구의 연필을 가져가놓고 모른 채 했다.”, “너는 친구의 연필을 가져가는 순간 곧바로 고백했어야 한다.” 또는 심지어 너는 친구의 연필을 훔친 것이다라고 양심 선언하라고 하는 것은 곤란하다.

 

김광현의 사례에서 비슷한 것을 발견한다. 김광현은 속이려는 의도 없이 기억된 몸의 동작으로 태그를 했고, 후에 글러브에 공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그 사실을 고백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필통을 열어보니 친구의 연필이 있었다고 말하면 충분한 것이다.

 

김광현에게 가해지는 양심선언은 스포츠의 본질상 어울리지 않는다. 진짜 스포츠에서 이루어지는 양심선언은 내가 약물 먹고 홈런 40개 쳤다.” “내가 애릭 해커에게 공을 던졌다.” “내가 승부조작을 했다이런 것이 스포츠의 양심 선언이다.

 

 

책임의 주체는 심판과 삼성벤치

 

이 사안의 초점은 김광현의 빈 글러브가 아니다. 빈 글러브를 우선적으로 캐치하지 못한 심판과 삼성벤치가 1차적인 책임이다.

 

심판이 정확한 판정을 내렸거나, 심판이 보지 못했더라도 삼성벤치가 항의했다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1초 이상 빨리 리터치 하는 주자를 상대 벤치가 문제 삼지 않는 것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그때 3루 주자에게 양심 선언하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도상훈 심판위원장 역시 미디어와 인터뷰에서 만약 그 상황에서 선수가 말을 해줬다면 세이프로 심판 판정이 번복 됐을 것이라며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심판과 삼성벤치가 모두 책임이 있다고 하기에 빈 글러브 상황은 단순하지 않았다. 김광현 스스로 뿐만 아니라 누가보기에도 그 짧은 순간 공이 누구의 글러브에 있다고 정확히 판독하기는 쉽지 않았다.

 

1군에서 1168경기 경험이 있는 심판도, 태그를 당한 최형우도, 심판보다 훨씬 멀리 떨어져 이 모습을 봤던 류중일 감독도 호크아이가 아닌 이상 진실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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