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및 권리= KBS)
[88서울올림픽 성공을 이끈 이어령의 4가지 결단]
[27년 전 올림픽 개폐회식의 성공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했던 갈릴레오 갈릴레이, 인류의 진화론을 외쳤던 찰스 다윈, 그뤼네발트의 고통 받는 예수를 거부한 살바도르 달리.
이 3명의 크리에이터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용기’와 ‘확신’이다. 그들의 창조물은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참을 수 없는 모욕과 생명의 위협까지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굴복하지 않았다. 자신의 창조물이 옳다는 확신을 갖고 용기 있는 주장을 한 끝에 그들은 시간이 흐르고 진실이 됐고 역사가 됐다.
크리에이터가 만든 크리에이션과 여기서 파생된 새로움이란 원래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준다. 기존의 타성에서 변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속성은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와 새로움은 타성과 자연스러움을 깰 때 시작된다. 그래서 창의성의 진정한 완성은 ‘확신’과 ‘용기’라는 요소를 마지막에 반드시 필요로 한다.
24일 방송된 이어령의 100년 서재 제9화 ‘벽을 넘어서’에서 이어령 선생은 크리에이터가 가져야 할 그런 ‘용기’와 ‘확신’이 어떤 것인지를 선명하게 보여줬다. 선생은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폐회식 기획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벌써 27년이 흐른 행사다. 27세 미만인 분들은 대한민국에서 이 중요한 국제행사가 열렸다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다. 역사는 성공적인 행사로 기억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과 진통이 있었는지는 잘 알 수 없었다. 이 점에서 9회 방송은 역사 사료로서도 매우 큰 의미가 있었다. 크리에이터가 어떤 결단을 내리느냐에 따라 세계가 지켜보는 국제적 이벤트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줬기 때문이다.
물론 88년 서울 올림픽 개폐회식 성공이 이어령 선생만의 업적은 아닐 것이다. 분명 이름이 가려진 채 곳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한 모두의 성공일 것이다. 하지만 기획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던 이어령 선생이 4가지 중요한 결단을 하지 못했다면 대한민국의 첫 번째 올림픽은 자칫 빛을 다 내지 못할 수 있었다.
(사진 출처 및 권리= KBS)
첫 번째 이어령 선생의 결단은 언어의 선택에서부터 시작했다. 방송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익히 아는 88올림픽의 대회 모토 ‘벽을 넘어서’가 처음에는 ‘장벽을 허물고’였다. 도대체 장벽을 허물고가 뭔가. 이 언어 자체가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동서간 이념의 장벽을 허물고 화합으로 가자는 메시지를 일견 줄 수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언어를 느껴보자. ‘장벽을 허물고’는 듣는 순간 ‘한 컷의 사진’만 머릿속에 찍힌다. 뭔가 장벽이라는 긴 벽이 시각화되고 그 벽이 무너지는 장면이 연상된다. 하지만 올림픽 모토는 한 장의 사진보다는 수십 장의 사진을 연상하는 것이 유리한 상징의 무대다. 이런 무대를 여는 도입 언어에 과연 ‘장벽을 허물고’가 어울렸을까.
이어령 선생의 결단은 옳았다. ‘장벽은 허물고’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방송 초기에 선생은 너무 화가나 ‘장벽을 허물고’는 “절대 안 돼”라는 개인적 낙서를 개막식 시나리오 대본 맨 뒤페이지 여백에 썼고 이것을 혹시 나중에 누가 볼까 다시 다른 낙서로 덮었다는 코믹한 일화를 웃으면서 소개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만큼 절박했다는 마음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정말로 88올림픽 대회 모토가 ‘장벽을 허물고’로 결정됐다고 상상해보자. 27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다시 이 언어를 보면 올림픽이 아니라 중고등학교 운동회 슬로건으로 보인다. 굳이 풀어쓰자면 유치하다는 뜻이다.
(사진 출처 및 권리= KBS)
두 번째는 강상제에서 용(龍)을 쓰지 않은 결단이었다. 강상제는 올림픽 최초로 주경기장 안 밖에서 동시에 개막식이 진행되는 이벤트였다. 스타디움 밖에서부터 행사를 시작해 한강과 남산을 중심으로 발전된 대한민국의 모습을 전 세계에 보여주려는 의도가 깔린 이어령 선생의 영민한 아이디어였다.
그런데 미리 계획한 대본에는 무수한 용들이 있었다. 용틀임을 하면서 용들이 한강에서 튀어 올라가고 많은 사람들이 용의 탈을 쓰고 등장했다. 심지어 성화대까지 용이 휘감아 올라가는 그림이 설정돼 있었다.
선생은 이런 대본을 보고 놀라 소리쳤다.
“용을 쓰면 큰일 난다!”
이유가 있었다. 용은 선생의 설명대로 전 세계인이 용을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한국이 아닌 중국을 먼저 떠올린다는 것이 가장 치명적이었다. 용하면 이소룡이다. 해외의 중국음식점 치고 드래곤(dragon)을 쓰지 않는 집은 없다고 했다. 한국이 용을 올림픽에서 쓰면 중국의 속국 문화고 한국 문화의 차별성이 없다는 것을 수십만 세계인들에게 광고하는 꼴이었다.
그래서 선생은 이후 행사를 준비하면서 말끝마다 “용쓰지 마라”를 달고 다녔다. 별명 ‘드래곤 킬러’는 그렇게 붙었다. 선생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세계 사람들이 볼 때 ‘한국하면 중국 옆에 붙은 속국에 옛날부터 조공도 바치고 지들이 무슨 문화가 있겠어? 아시아하면 중국 아니면 일본이지’(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용을 안 썼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없앨 수 있었다.) 공통점을 고려하되 결국은 무엇이 다른가로 승부해야 한다. 문화의 관점에서 크게 보면 아시아지만 좁게 보면 한국인이고, 더 좁게 보면 내가 된다. 마지막 남은 나는 누구인가. 여기서 해답이 나온다.”
이 문제는 작지만 의외로 큰 문제였다. 정말로 선생의 말처럼 88올림픽에서 다량의 용을 써서 그 화면이 전 세계에 송출됐다면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자칫 88서울 올림픽이 88상하이 올림픽이 될 뻔했다. 마지막 남은 나는 중국인이 아니다. 한국인이다. 선생의 결단은 이 점을 지키고 찾게 해줬다.
(사진 출처 및 권리= KBS)
세 번째는 ‘굴렁쇠 소년’ 이벤트에서 나온 여러 결단이었다.
침묵의 1분으로 알려진 굴렁쇠 소년의 ‘정적’을 통해 이어령 선생은 한국의 미학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방송에서 농담으로 선생이 가치를 많이 알아주지 않아 슬프다고 말한 것처럼 이 이벤트는 대표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과소평가된 기억으로 남아있다.
방송에서 처음 공개된 비화들은 주목할 내용이 많았다. 먼저 사람들이 ‘굴렁쇠 계획’에 많은 반대를 했다는 점이었다. 반대 이유가 기가 막혔다. “굴렁쇠 소년이 넓은 경기장을 가로 질러가다 넘어지거나 놀라서 운다, 심지어 중간에 오줌까지 싸면 어떡하느냐”며 선생을 말렸다. 절대 안 된다며 엄청 반대했다고 했다.
여기에 누가 굴렁쇠 소년이 되느냐 에도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정권의 실세가 선생에게 자신의 아들을 선정해달라고 압박하거나 기타 재벌 2세, 장군의 아들 등 어린이 자리를 놓고 온갖 권력의 이전투구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다.
굴렁쇠 소년의 의상을 두고도 패션계에서는 기회는 이때다 싶어 이름을 알리고 싶은 자들의 욕심이 판을 흔들었다. 최대한 화려하게 알록달록한 색깔로 덧칠하거나 서커스 모자까지 등장해 소년의 용모를 화려하게 치장하려고 했다.
하지만 선생은 이 모든 잡음을 ‘동심의 세계’라는 단 하나의 화두로 깔끔하게 정리했다. 동심의 세계에는 어떠한 권력, 이념, 종교, 성별, 빈부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바덴바덴에서 서울 올림픽 개최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던 ‘1981년 9월 30일에 태어난 아이’라는 극도로 범위를 좁힌 객관적 선정 기준으로 한국의 상징으로 전 세계에 내 놓은 아이가 부정으로 선정됐다는 오해를 사전에 차단했다. 여기서 윤태웅 어린이(당시 9세)가 굴렁쇠 소년으로 최종적으로 뽑혔다.
소년의 의상 역시 화려한 옷은 필요 없었다. 당시 세계인들에게 한국의 어린이는 전쟁고아와 많은 해외 입양의 얼룩진 이미지가 박혀있었다. 그것을 가리기 위한 지나친 치장은 오히려 역효과였다. 그사이 한국의 발전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다. 보통 집에서 입는 반바지에 운동모자를 쓰게 한 전략은 너무나 평범해서 더욱 비범하게 보인 선택이 됐다.
선생은 굴렁쇠 소년이 중간에 넘어지거나 울어도 창피할 것이 없다는 담대함을 보여줬다. “어차피 당신들이 서울을 개최지로 결정하지 않았다면 얘는 여기 없다. 그때 태어난 아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만 해도 괜찮다. 한국이 발전된 산업화 속에서 전쟁고아가 아닌 이런 아이를 자랑스럽게 키워냈다는 것을 전 세계에 나타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사진 출처 및 권리= KBS)
네 번째 용기와 확신은 폐회식 이벤트 ‘오작교’였다.
선생은 심청이 인당수로 가는 여정을 그린 심청가 중 ‘범피중류’를 올림픽 폐회식 행사로 계획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난관에 빠졌다. IOC에서 전 선수들이 경기장 안에서 모여 행사를 마무리하라는 것을 이유로 절대로 폐회식에는 무대를 만들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무대가 반드시 필요했지만 무대 없는 행사를 기획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
선생은 폐회식에서 한국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대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돌파구는 보자기처럼 형태를 특정하기 힘든 유연한 무대, 까마귀와 까치가 은하수에 놓은 다리 ‘오작교’에서 열렸다.
문제는 오작교를 ‘어떻게 만드느냐’였다. 아이디어는 가벼운 스티로폼이었다. 6명의 사람이 한 장의 스티로폼 다리를 안쪽에서 들고 많은 사람들이 이어 붙이자 1m60cm 가량 높이의 유연한 무대가 삽시간에 만들어졌다. 수백 명의 심청이가 이 다리를 지나갔다.
추가적으로 구름과 안개 효과를 위해 소독차를 동원하고 달빛은 군대 차량의 탐조등을 썼다. 밤의 적막을 뚫고 나오는 빠른 다듬이 소리가 합쳐지며 종합된 여러 특수 효과가 한데 모이자 당시 화면을 다시 봐도 과거의 이벤트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환상적인 장관이 펼쳐졌다. 결국 폐막식도 개막식에 이어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됐다.
(사진 출처 및 권리= KBS)
이어령 선생은 방송 내내 27년 전 기억을 즐겁게 떠올렸다. 지금까지 방송된 9편의 방송 가운데 가장 신이 나신 것 같았다. 방송시간 50여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지난 포스팅에서 싱크탱커는 “이어령이라는 뛰어난 크리에이터가 올림픽 개폐회식 행사를 기획한 것은 한국에게 행운이었다”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방송을 되새기며 나는 이 생각에 다시 확신을 갖게 됐다.
아시아의 작은 나라라는 한국이었다. 전쟁에 부서졌던 서울의 폐허였다. 특별한 문화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받던 대한민국이었다. 올림픽이라는 이벤트를 한 번도 치러본 적이 없는 나라였다. 올림픽은 가장 우리의 것, 세계 어디에도 없는 우리만의 독창성을 세계에 자랑해야 하는 국가의 창의성이 종합적으로 표출되는 행사였다.
한국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또 많은 세월 한국의 역량과 새로움에 대해 연구하고 고민했던 한 명의 크리에이터는 이 행사를 기획하며 많은 난관에 부딪혔다. 반대의 벽에도 가로막혔고 세심하게 보아야 할 부분들이 도외시 됐다.
그러나 자신이 내린 선택이 옳고 맞다는 확신이 있을 때, 그는 용기 있게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결단을 내렸고 역사는 그 결단을 성공적으로, 또 자랑스럽게 기억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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