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및 권리=CSN)
[적군의 스타를 예우한 필라델피아의 통 큰 환호]
[스포츠를 통해 본 고향의 동질성]
적군은 자장가고, 아군은 스펙터클 뮤직이다.
적군은 모기소리고, 아군은 천둥소리다.
이것은 NBA 홈팀이 경기 전 양 팀 선수들을 소개할 때 주로 사용하는 기본 콘셉트다. 당연히 홈팀 장내 아나운서는 드높은 사운드로 우리 팀의 사기와 홈 관중들의 열기를 뜨겁게 만들어야 한다. 반면 상대팀 선수들은 조용하고 특징 없이 표현한다.
심지어 1990년대 중반 휴스턴 로키츠는 1994년 NBA 파이널에서 상대팀 올랜도 매직 선수들을 소개할 때 배경음악으로 무슨 범죄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기괴한 음악을 틀었다. 앤퍼니 하더웨이나 샤킬 오닐을 어둠의 사도로 만들었다.
반면 그들의 스타 하킴 올라주원을 소개할 때는 웅장한 뮤직 속에 “하킴 올~~~~~~~~라주원”이라며 분위기를 한껏 높였다. 여기서 포인트는 ‘올’을 최대 5초 이상 길게 끄는 것이다. 이정도로 NBA의 홈팀은 편파적이다. 심리전의 일종이다.
그런데 아래의 영상 속에 등장하는 사운드를 한번 들어보자.
(사진 출처 및 권리=CSN)
귀가 믿어지는가. 완전히 착각했다. 이 사운드는 LA 레이커스의 홈구장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다. 2일 LA 레이커스의 슈퍼스타 코비 브라이언트(37)를 홈구장 웰스 파르고 센터에서 맞은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76ers) 장내 아나운서의 흥분한 목소리였다. 필라델피아 관중들도 격한 환호를 보냈다. 도무지 피아식별이 힘들 정도로 사람들은 “코비! 코비!”를 연호했다.
이유는 고향 팀이었기 때문이다. 올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코비는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출신교 로워 메리언 고등학교에서 보낸 1996년이 필라델피아에서 뛴 마지막 해였다. 이후 코비는 20년간 ‘레이커스맨’으로 살며 NBA의 전설이 됐다.
이날 코비에 대한 환대는 최근 필라델피아 팀의 사정 속에서 더욱 이례적이었다. 3가지 큰 이유가 있었다.
일단 팀 성적을 보자. 필라델피아는 2일까지 올 시즌 NBA에서 희대의 꼴찌로 굴러 떨어졌다. 18연패를 당하고 있었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연패까지 치면 무려 28연패다. 선수와 감독은 팬들에게 조롱을 당하며 미국 메이저 스포츠 역사상 최다 연패 기록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런 최악의 팀 분위기 속에서 적군의 스타를 드높이 소개하고 환호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또한 이날 하프타임에는 지난 9월 세상을 떠난 모제스 말론 추모행사가 열렸다. 하지만 ‘모제스 말론’의 이름값에 비해서는 작은 행사였다. 행사 시간대가 식전 행사가 아닌 하프타임으로 밀렸다는 것이 방증이다. 마치 코비라는 주인공을 위해 조연을 배치한 것 같았다.
하지만 모제스 말론은 필라델피아의 레전드이자 ‘NBA 역사상 위대한 50인의 선수’에도 선정된 명예의 전당 입성자다. 이런 선수는 코비의 조연이 아니라 구단 차원에서 단독 행사로 치러지는 것이 맞다. 하지만 말론은 이날 코비로 인해 완전히 묻혔다.
(사진 출처 및 권리=CSN)
여기에 코비는 원래 필라델피아 관중들에게 전통적으로 비호감 선수에 가까웠다. 2001년 NBA파이널에서 코비가 고향 팀의 가슴에 비수를 꽂으며 우승을 빼앗은 쓰라린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코비는 앨런 아이버슨(A.I.)과 대립하며 여러 차례 트래시 토크로 설전을 주고받았다.
아이버슨이 누군가. 필라델피아의 심장이자 아직까지도 필라델피아 팬들에게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다. 그런 A.I.를 코비가 건드렸으니 그들에겐 당연히 이듬해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집단 야유를 퍼부을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이날 필라델피아는 코비를 오래된 구원(仇怨)이나 적군의 수장이 아니라 NBA의 전설이자 ‘우리 땅에서 자라고 큰 위대한 선수’로 극진히 예우했다. 경기 전 다큐멘터리로 코비의 지나온 과정을 영상으로 만들어 전광판에 띄웠으며, 또 다른 팀의 전설 ‘닥터 J’ 줄리어스 어빙과 로워 메리언 고등학교 은사 그렉 다우너 감독까지 함께하며 24번이 기입된 고교 유니폼을 선물했다.
코비는 경기로써 화답했다. 코비는 역시 코비였다. 그는 1쿼터 시작과 함께 화려한 개인기를 뽐내며 3점슛 3개를 연달아 림에 꽂았다. 헤지테이션에 이은 크로스오버, 스크린 앤 점퍼와 스텝백 점퍼를 폭발하며 필라델피아 홈코트를 전성기 시절 ‘쇼타임’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이날 경기를 본 사람들은 느끼겠지만, 1쿼터 코비의 3점슛 3개가 연속으로 터졌을 때 필라델피아 선수들은 수비를 아주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 경기 초반 관중들의 환호를 인지하고 코비 스스로 보여주는 플레이(코비 역시 이것이 필요함을 그 순간은 알았을 것이다)를 할 수 있도록 사실상 방치했다.
레이커스 벤치와 선수들은 스크린과 아이솔레이션으로 희생하며 코비가 개인기를 펼치게끔 공격권 3개를 제공했으며, 필라델피아 수비진 또한 이런 상황에 있는 코비를 더블팀으로 막는 추접스런 디펜스는 하지 않았다. 물론 이런 무언의 약속 같은 이벤트성 시간은 대략 경기 초반 3분 정도로 마무리 됐다.
결과도 해피엔딩이었다. ‘그 문제의 3분’이 있었음에도 필라델피아는 이날 마침내 18연패를 끊고 승리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코비의 난사도 한몫했다. 하지만 필라델피아 팬들이 가장 큰 박수를 보낸 선수는 역설적으로 홈팀 선수들이 아니라 코비였다. 코비는 경기가 끝난 뒤 손을 들고 작별의 키스를 보내며 경기장을 그렇게 빠져나갔다.
(사진 출처 및 권리=CSN)
싱크탱커는 지금까지 언급한 과정들을 다시 한 번 떠올려봤다.
애증 섞인 적군의 적장, 고향을 찾은 우리 땅의 스타, 그를 대하는 예우, 기립박수와 환호...그리고 경기에서 플레이로 보여주는 그 스타. 18연패에 빠졌음에도 경기 초반 스타의 쇼타임을 위해 기꺼이 수비에 탄력성을 보여준 상대팀.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2015년 12월 2일 NBA어느 경기의 전적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오직 스포츠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별했던 이 날의 품격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문득 우리를 돌아봤다. 참으로 이런 비교 글을 쓸 때마다 개인적으로 안타깝다. 왜 우리는 이런 멋진 스포츠 문화를 만들지 못할까. 왜 우리는 데릭 지터나 코비처럼 은퇴를 앞둔 대선수들이 원정 구장에 가면 그들에게 아낌없는 기립 박수를 보내지 못할까.
원정 구단 운영팀은 왜 상대팀 선수의 업적이나 커리어를 빛내주는데 그토록 인색할까. 고향 출신의 선수들이 은퇴를 앞두고 고향 구장이나 코트를 찾았을 때 한국의 스포츠 팀들은 어떤 대우를 했을까.
물론 미국의 땅덩어리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대선수를 그들의 홈구장에서 볼 수 있는 시간은 우리와 달리 1년에 한두 번으로 제한되는 부분이 스타를 직접 보는 간절함에서 차이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포츠의 진보된 문화, 여기서 파생하는 역사는 땅의 크기가 아니라 땅을 생각하는 마음, 고향이라는 동질성을 허투루 대하지 않는 세심함에서 시작될 수 있다.
고향이란 인간에게 무엇인가. 우리 땅에서 같이 자란 사람은 내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시인 정지용은 시 ‘향수’에서 고향을 “흙에서 자란 내 마음,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로 표현했다. 고향은 이처럼 꿈에서도 잊히지 않는 곳이며 국적과 지역을 불문하는 곳이다.
고향은 한국에서 명절 때마다 국가적 대이동으로 해외토픽으로도 보도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애석하게도 나와는 전혀 연고가 없는 이국땅 필라델피아에서 어느 고향 스타를 열렬히 맞이하는 스포츠팬들의 모습에서 고향과 스포츠의 품격을 함께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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