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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 창조적 글쓰기

거짓말, 카사노바, '문행일치'의 모순

 

 

 

[‘은 왜 그 사람이 될 수 없을까]

 

로버트 펠드먼의 저서 <우리는 10분에 세 번 거짓말 한다>에는 매우 의미 있는 문장 하나가 있다.

 

심리학자들의 오랜 주장에 따르면 (인간이)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은 창조적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라는 문장이다.

 

이 문장은 무엇을 뜻할까. ‘자연스러운 모습창조적 노력은 도대체 무슨 관계일까.

 

골자는 이렇다. 인간은 사회 속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자신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드러내는데, 그때 자신의 표현방법은 사회적 맥락, 본인의 기분, 성격, 이미지 관리의 욕구 등을 모두 고려한 선택의 결과로 나타난다. 즉 인간은 '지능적인 사회적 존재'를 지향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끌리는 이성 앞에서 스스로의 평소 말과 외모를 수정하는 것이 지능적인 사회적 존재의 하나의 유형이라고 보면 무리가 없다. 그 이성 앞에서는 자연스러워야 한다. 뭔가 자신과 다른 모습이라고 상대가 예측하게 해서는 안 된다. 나쁘게 보면 속이는 것이고 좋게 보면 노력이고 심리학자들의 표현대로 창조적이라는 수식어도 붙일 수 있다.

 

펠드먼은 자기 저서에 조금 더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자기제시가 창조적 프로세스라는 것은 그만큼 자기제시 기법이 속임수로 변질되기 쉽다는 뜻이고, 그래서 거짓말이 사회에서 빈번하게 쓰인다고 주장했다.

 

거짓말은 스스로의 이미지, 자신이 믿고 있는 대상, 개념을 의식적으로 행동과 말을 통해 속이는 것이다. 언급한 것처럼 창조적 노력으로 나타나는 선한 거짓말도 있고 사기로 나타나는 악한 거짓말도 있다.

 

여기서 속임을 당하는 사람이 속임을 당한 이유는 속이는 사람의 말과 행동 때문이다. 그 사람==행동을 믿을 수 있는 이유로 삼위 일체시켰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행동이 아닌 텍스트’, 과 그 사람의 일치 문제이다.

 

텍스트는 말과 행동만큼이나 타인의 의식을 지배할 수 있다.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부분은 말과 행동 이상으로 글이 그 사람이라고 철썩 믿는 현상이다.

 

 

싱크탱커가 오래전부터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과거 같은 직장에서 일했던 어느 선배 때문이었다. 그는 최고의 텍스트 생산자였다. 표현의 기법과 유려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의 글은 거의 사랑과 감동으로 춤췄다.

 

그의 글을 읽는다면 독자로서는 이런 텍스트를 만드는 사람은 반드시 엄청난 성인이거나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법 없이도 사는 청초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그는 직장 내에서 폭군이자 만인의 기피대상이었다. 그는 권모술수의 대가였으며, 밤 문화의 황제였다. 영롱한 이슬 대신 양주잔의 노란 액체를 들이키는 것을 즐겼으며 지고지순한 사랑보다는 카사노바의 여성 편력을 주로 탐닉하는 어둠의 난봉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글만 쓰면 다시 영롱한 이슬로 급변했다. 그것이 그에게는 사회적 존재로서 자연스러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창조적 노력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나는 결론 내렸다.

 

글이 곧 그 사람은 아니다.

 

매우 반갑게도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시대를 앞서 간 씽킹 크리에이터 마광수 교수도 오래전에 인정했었다.

 

마광수 교수는 자신의 에세이 <인간>(해냄출판사)에서 글이 곧 그 사람은 아니다라는 것을 실증할 매우 주목할 만한 일화를 소개한다. 박마리아가 4.19 혁명이 있기 몇 년 전에 쓴 <여성과 교양>이 마광수 교수가 거론한 문제의 책이다.

 

마 교수는 그 책의 저자가 이승만 정권 때의 실권자였던 이기붕의 처 박마리아인 것에 놀랐다. 박마리아라면 지금까지도 세상 사람들 입에 역사적 관점에서 나쁜 여자로 오르내리는 사람이다.

 

(이기붕과 박마리아 일가, 사진 출처 및 권리=한겨례 신문)

 

마 교수는 아래와 같이 느낌을 전했다.

 

나는 그 책을 보고 나서 깊은 회의에 빠져들었다. 그 책에 씌어 있는 글 자체를 놓고 박마리아를 평가한다면 누가 그녀를 악인이라 할 것인가? 그만큼 그 책은 품위 있는 내용의 글들로 채워져 있었다. 책이 출판됐을 당시에 그 글을 읽은 독자들은 박마리아의 인품을 흠모했을 게 분명하다. 박마리아의 인격과 그 글을 분리시켜 놓고 생각해 본다면, 그 글 자체는 너무나 훌륭한 것이었다.

 

(중략)

 

물론 박마리아가 정말로 나쁜 사람인지 아닌지는 함부로 속단할 수 없는 문제다. 하지만 그녀를 일단 역사적 통념으로 평가한다고 할 때, 박마리아가 쓴 글은 인격적으로 불완전한 사람이 가식적으로 쓴 글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광수 교수의 지적에 크게 공감했다. 마 교수에게 박마리아는 나에게 카사노바 직장 선배와 동일 선상이었다. 그는 글이 갖고 있는 품위조리에 홀려 글을 쓴 필자의 인격을 높이 평가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 글이 갖고 있는 위선성과 과장성, 그리고 안이성과 허위성이 독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심각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진 출처 및 권리= <창조의 재료탱크>)

 

그래서 필요한 것은 텍스트를 향한 분리적 관점과 비판적 사고다. 텍스트는 텍스트 자체로만 바라보아야만 한다. 텍스트와 텍스트 생산자를 일치 시킬 때 많은 오류가 생긴다. 지금까지 철저하게 믿어온 글은 곧 그 사람이다라는 말은 잘못된 것이다.

 

글만 보면 선인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악인이었다는 좁은 측면 이외에도, 글이 주는 이미지와 글을 쓴 사람이 주는 이미지의 괴리라는 넓은 차원에서 바라보면 사례는 여러 가지다.

 

몇 년 전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전도사로 알려진 분은 일생을 행복한 글을 써오며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을 전했다. 행복에 관한 많은 책도 남겼다. 하지만 남편과 함께 안타깝게도 동반자살이라는 불행한 비극을 택했다.

 

몇 개월 전 많은 사람들에게 언어의 마술사로 알려진 분은 일생을 아름다운 글을 써오며 감동을 전했다. 뛰어난 언어로 많은 소설을 남겼다. 하지만 표절시비에 휘말리며 작가의 맑은 창작 정신과 언어에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럼 글은 곧 그 사람이 아니다는 왜 일어날까. 마 교수는 문자의 인식이라는 간접경험을 직접경험으로 자신도 모르게 과대평가하는 인간의 약점과 글 자체의 모순을 지적했다.

 

싱크탱커는 하나의 이유를 더 추가하고 싶다. ‘언행일치(言行一致)’만큼 문행일치(文行一致)’가 쉽지 않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다. 자신의 말한 언어를 행동과 완벽하게 일치시키는 사람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퍼펙트 언행일치는 이상향이다. 언행일치가 제대로 되는 사람은 슈퍼맨으로 살거나 종교에 귀의해야 한다.

 

자신이 쓴 언어자신이 말한 언어와 마찬가지다. 글과 인간은 사실은 일치될 수 없는 성격인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다고 문행일치를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에 글과 인격이 심각하게 괴리된 직장선배 카사노바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감싸줘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래서 결론을 짧고 확실하게 하겠다.

 

절대로 텍스트를 과신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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