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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기법

영화 <봄>, '양다리 사랑'의 아름다운 최적배합

 

(사진 출처 및 권리: 영화 <봄> 공식 페이스북)

 

[영화 <>은 왜 뛰어난 작품인가]

[창의성 기법으로서의 감정의 황금비율(Golden Ratio)’]

 

(스포일러 포함)

 

 

이제 완연한 봄이다. 지난해 보았던 영화 <, (Late Spring, 여름 끝에 찾아온 봄)>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 영화를 아름답게 기억하시는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싱크탱커는 이 영화를 조금은 원색적으로 표현하고 글을 시작하겠다.

 

한마디로 영화 <>양다리 사랑에 관한 영화다.

 

양다리? 이 아름다운 영화가 양다리 사랑이라니...가정의 달 5월에 쓰인 저급한 표현에 인상을 찌푸리셨다면 이해하겠다.

 

물론, 아름다운 영화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화 <>의 기본 콘셉트는 누가 뭐래도 내게는 양다리 사랑이었다. 역설적으로 그랬기 때문에 이 영화는 최근 5년간 본 한국영화 가운데 단연 최고의 영화였다.

 

영화 <>의 주요 인물 구도는 양다리 사랑을 논할 수 있는 기본 구성을 갖추고 있다. 한 남자와 두 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조각가 준구(박용우 분), 그에게 끝까지 삶의 의지를 찾아주려던 아내 정숙(김서형 분), 가난과 폭력 아래 삶의 희망을 놓았다가 누드모델 제의를 받는 민경(이유영 분) 세 사람이다. 준구는 정숙과 민경 사이에서 감정의 양다리 상황에 놓이게 된다.

 

먼저 이 영화의 소재로 언급한 양다리 사랑이란 말은 인간을 불편하게 만든다. 양다리에 사랑이 붙는다는 것 자체가 바닐라 아이스크림 위에 뿌려진 겨자 소스다. 불협화음이다.

 

양다리는 두 명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이다. 남녀 간의 사랑은 1:1을 기본 전제로 한다. 사랑이 깊어지면 결혼을 하고 그때부터 일부일처제가 성립한다. 여기서부터 언어’ <양다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기본적인 사랑의 공식에 합치되지 않는다.

 

양다리가 어울리는 하이퍼텍스트는 긍정의 언어와 거리가 멀다. ‘배신’, ‘바람둥이’, ‘두 집 살림’, ‘간통’, ‘이혼’, ‘카사노바와 주로 호응된다. 양다리가 세 다리 네 다리로 더욱 확장되면 요즘 언어인 어장관리로 파생된다.

 

모두가 나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면 그 사람만 바라보아야 한다. 여자 친구와 길을 가다 지나가는 섹시 미녀에 한 눈을 팔면 안 된다. 결혼했다면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아내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한다. 남자 친구에게는 잔다고 거짓말하고 몰래 클럽에 가서 다른 남자와 부비부비를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하게 생각해보자.

 

당신은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양다리를 안했을까. 설사 실행에 옮기지 않았더라도 단 한 번이라도 다른 이성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경험을 안했을까. 하다못해 어장관리도 단 한 번도 없었을까.

 

만약 양다리의 경험이 한 번이라도 없는 사람이라면 싱크탱커는 당신은 이성에게 매우 매력이 없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심지어 원초적 욕망이 없는 인간이라고 결론 내리겠다!

 

양다리는 모든 생물이 갖는 자연 현상으로써 작용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학자들은 이 점을 지적한다.

 

평생을 해로 한다는 원앙을 예로 들어보자. 신혼부부의 머리맡에 원앙 한 쌍 인형이 자주 놓인다. 원앙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정절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런!

 

연구원들의 DNA 테스트 결과 원앙 암컷이 낳는 새끼 가운데 약 40%가 남편이 아닌 다른 수컷의 새끼로 밝혀졌다. 도대체 원앙 암컷은 어디 가서 무슨 짓을 했을까. 회색 늑대, 황제펭귄, 백조, 비버, 바다 해마도 다르지 않았다. 이들의 일부일처제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의학박사 신현걸씨에 따르면 (LA중앙일보 2013) 새는 수놈이 잠깐 집을 빈 사이 다른 새가 쳐 들어가 일을 저질렀고, 늑대도 무리안의 불륜 때문에 암놈들이 박 터지게 싸웠다. 황제펭귄은 매해 파트너가 바뀌는 쇼윈도 부부였으며 백조의 5~6%는 이혼을 했다. 비버 역시 귀여운 용모와는 다르게 멋있는 젊은 놈이 나타나면 바람을 폈다.

 

동물도 이런데 인간은 물론이다. 조 쿼트의 저서 <정자에서 온 남자, 난자에서 온 여자>에는 여성의 번식 전략이 나온다. “부적절한 연인과 외도를 하는 여자들은 남편과 관계할 때보다 3배나 많은 정액을 빨아들인다. 남편이 있는 여성이 외도 할 때는 더 많은 성적 쾌감을 경험한다.”

 

그럼 도대체 바람을 안 피고 양다리를 하지 않는 지구상의 생물은 존재하기는 할까.

 

놀랍게도 있었다! 아래의 사진 속 위대한 생물이었다.

 

(디플로준 파라독숨, 완벽한 일부일처제의 실체)

 

미국의 진화생물학자 데이비드 바래시는 <일부일처제의 신화>에서 일부일처제는 딱 한 종을 제외하고 자연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 딱 한 종이 사진속의 주인공 디플로준 파라독숨(Diplozoon Paradoxum)’이었다.

 

외국 자료를 찾아보면 “Diplozoon paradoxum is a flatworm from the class Monogenea found in freshwater fishes in Asia and Europe and known for its complete monogamy.”라는 말이 나온다. 한마디로 완벽한 일부일처제(complete monogamy)’였다.

 

그런데 추가적으로 이어진 바래시의 지적은 약간은 김을 빠지게 만든다.

 

디플로준 파라독숨은 민물고기에 기생하는 편형동물의 일종으로서 아메바와 유사하다. 이 동물은 어릴 때 수컷과 암컷이 만나 몸이 찰싹 붙어서 함께 자란다. 양다리 사랑을 할 기회 자체가 애초에 전혀 없는 것이다. 이미 몸이 단일한 유기체를 이뤄 평생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선 헤어지고 싶어도 몸을 자르지 않는 이상 헤어지기 힘든 참으로 불쌍한 녀석들이다.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라 결론은 나왔다. 지구상 모든 생물에게 양다리는 부정하고 싶은 부정의 언어지만 피하기 매우 힘든 자연의 현상이다. (참고로 이 글의 취지는 양다리 사랑을 조장하거나 옹호하는 글이 절대 아니다. 오해 없기를!)

 

(사진 출처 및 권리: 영화 <봄> 공식 페이스북)

 

그럼 영화 <>의 남자 주인공 준구의 행동을 어떻게 봐야 할까.

 

정숙과 민경 사이에서 놓였던 준구는 감정의 양다리 상황 속으로 점점 빠져들게 된다. 처음에 준구는 폭력적인 남편에 시달렸던 민경의 어려운 처지에 동정과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점점 민경에 의해 자신이 삶의 의지를 찾게 되는 과정이 나타난다. 영화는 후반부까지 준구가 민경을 사랑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일체의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준구는 민경을 위해 그녀의 동거남을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하는 충격적인 파국을 보여준다. 준구는 시한부 인생이었다. 자신의 목숨이 다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남은 목숨을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위해 사용했다.

 

준구가 감정의 양다리 사랑을 했다고 내가 유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당신은 상상할 수 있나. 평생을 헌신한 나의 아내 말고 다른 여자를 위해 (설사 시한부 생명이라 하더라도) 목숨을 버릴 수 있나? 수많은 역사를 통해 남자는 사랑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목숨의 객체가 자신의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였다! 내놓은 것도 다이아몬드 반지가 아닌 목숨이었다. 이건 아내에 대한 엄청난 감정의 배신이었다.

 

그래서 준구가 민경을 위해 마지막 생명을 다하고 죽은 것을 알고 아내 정숙은 어둠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매우 절망한 듯한 모습이 비춰진다. 다른 여자를 향한 남편의 최종적인 마음에 실망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한 번의 반전이 있었다. 정숙이 준구의 작업실을 찾아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정숙은 준구가 사망하기 직전 남긴 한 통의 편지와 조각상을 발견하게 된다.

 

조각상은 준구 자신의 얼굴이었다. 조각가로 살면서 단 한 차례도 자신의 모습을 담은 적이 없는 준구였다. 하지만 조각상은 편하게 미소를 지으며 정숙을 바라보고 있었다. 편지의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비록 내 몸은 겨울을 향하고 있지만 다행이 내 작업은 비로소 봄을 맞았어. 나는 이 작품의 제목을 봄이라 지으려고 해. 예술보다는 삶, 그 자체가 더 값어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이 얼굴에는 내 삶이 배어있고 내 삶에는 당신이 투영되어 있어. 부족한 사람이라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이제야 고백하네.”

 

편지를 읽고 정숙은 남편이 사랑한 진심이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비록 다른 여자를 위해 마지막 목숨을 버렸지만, 남편의 인생을 함께한 '삶이라는 가치'가 만든 현재 조각상의 얼굴이 최종적으로 향하고 있던 것은 정숙 자신이었음을 알고 그녀는 감동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영화는 그렇게 마무리 됐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란 이런 것이다. 사진 출처 및 권리: 영화 <봄> 공식 페이스북)

 

준구는 매우 전략적인 남자였다. 만약 마지막 남긴 조각상이 민경의 얼굴이나 정숙의 얼굴이었다면 영화는 마지막에 순간적으로 뻔한 결말이 되거나 품격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준구는 놀랍게도 자신의 얼굴을 남겼다. 자신의 생명을 내놓고 조각상을 만들게 된 모든 과정에는 민경이 있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미소를 머금은 자기 조각상이 보여준 편한 모습의 이유에는 아내 정숙을 담았다. 가히 사랑의 감정을 두 명의 여자에게 완벽하고 최적으로 배합한 것이었다. 영화 <>은 그래서 양다리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영화였다.

 

이 영화는 숨어있는 양다리 사랑이 갖는 감정의 굴곡을 담았다. 결코 야하지 않은 맥락이 있었던 노출깨끗한 수채화 같은 영상미와 연기자들의 절제된 호연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결코 추접스럽게 그리지 않았다. 너무나 예쁜 사진 같은 풍경과 훌륭한 구성을 통해 한 남자가 가질 수 있는 감정의 배합 문제를 수준 높게 그려낸 뛰어난 작품이었다.

 

영화 <>은 칭찬이 아깝지 않은 영화였다. 개봉관이 부족한 것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가치를 인정했다. 각종 해외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 등 무려 8관왕을 차지했다. 두 명의 여자 연기자 이유영과 김서형도 각각 밀라노와 마드리드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사이좋게 수상했다. 감독 조근현의 남다른 연출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영화 <>은 창의성 기법으로서 가치가 컸다. 조근현 감독이 보여준 최후의 조각상 장면이 영화가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줄 수 있는 그 어떤 영화보다도 빛났고 창조적이었기 때문이다.

 

창의성은 그 어떤 것이든 주로 결합과 배합에서 나온다. 사물을 배합하기도 하고 이질적인 현상을 섞기도 한다. 가장 어려운 것은 감정의 배합이다. 감정은 미묘한 생물이다. 설명하기도 힘들고 대부분 특정되어 있어 배합하기가 가장 어렵다.

 

그 감정이 사랑이라면 더더욱 어렵다. 그럼에도 영화 <>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의 배합 문제를 슬기롭게 연출했다. 준구가 왜 그래야 했는지, 두 명의 여자는 어떻게 준구로부터 마음의 사랑을 받았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줬다.

 

사실은 결합과 배합의 최적비율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그리스의 수학자 피타고라스는 오래전에 인간이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황금비(Golden Ratio, 黃金比)를 고민했다. 그가 찾아낸 비율은 정오각형별에서 짧은 변과 긴 변의 길이의 비가 5:8이라는 사실에서 찾아낸 1:1.618이었다.

 

영화 속 준구도 피라코라스처럼 최적비율을 생각했다. 최종적으로 두 명의 여자는 한 남자로부터 모두 사랑을 받았다. 남자는 사랑을 최적으로 배합했고 사랑의 감정을 조합해서 나눠주었다. 그의 양다리 사랑은 결코 추하지 않았다. 숭고한 아름다움이 되었다.

 

가슴안의 건축이자 마음의 완벽한 황금비율이었다.

 

그는 사랑에 대한 마음을 완벽하게 조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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