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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기법

이준익 감독과 <사도>, 탁월한 압축의 기술

 

(사진 출처 및 권리= 영화 <사도>공식 홈페이지 스틸컷)

 

[영화 <시네마 천국><사도>의 공통점]

[56년을 2시간으로...<사도>의 창의성 기법 '삭제'와 '압축']

 

이렇게도 쓰고, 저렇게도 쓰고, 모든 방법을 동원했는데 무언가 어색하다.

 

도무지 연결이 안 된다.

 

그럴 때 셰익스피어와 스티븐 킹 등 세계적인 크리에이터들이 한 목소리로 말했던 내용이 있다.

 

삭제다.

 

버리면 된다.

 

그런데 버리면 어딘가 모르게 아깝다. 불안하다. 나중에 쓰일 것 같다. 그래도 버려야 한다. 아무리 3번째 눈이 천리안을 가졌다 해도 인간의 얼굴에 3개의 눈을 그리면 괴물이 된다. 전체와 어울리지 못하면 과감하게 삭제해야 한다.

 

삭제는 압축을 담보한다. 크리에이터들은 고민 끝에 삭제를 통해 남은 정수들만 모아 이것들을 연결하여 최종적인 창조물을 완성한다. 불필요한 요소를 모두 가지치기하고 부피를 확 줄여 핵심만 대중들에게 공개한다.

 

그래서 삭제와 압축은 새로운 것을 추가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또 다른 변형 기법이자, 창의성 기법이다. 삭제와 압축은 경우에 따라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특성도 가진다.

 

영화나 소설 등 우리 주변의 크리에이션을 관찰해보면 삭제와 압축이 어떻게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아직까지도 싱크탱커의 기억에 삭제압축이 가장 잘 나타난 장면으로 선명하게 남아있는 영화는 <시네마 천국>이다.

 

주인공 토토(마코 레오나디)가 청년 시절 엘레나와의 사랑이 부모님의 반대로 좌절하자, 정신적 지주가 되어준 마을의 영사기사 알프레도는 토토에게 넓은 세상으로 나가 더 많은 것을 배울 것을 권유하고 토토는 고향을 떠난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변하는 데 마법의 11초가 쓰였다.)

 

그리고 영화는 ‘OST의 거장엔니오 모리꼬네의 환상적 멜로디가 흐르고 장면이 전환되면서 비행기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50대 신사(자크 페렝)가 홀연히 오버랩 되는데, 이 신사가 바로 토토였다. 20대 청년이 어느 순간 50대 중년이 된 것이다.

 

감독 쥬세페 토르나토레가 그 어느 순간에 쓴 시간은 불과 11초였다. 기차를 타고 마을을 떠났던 청년이 30년의 시간을 11초 만에 뛰어넘어 비행기를 타고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영화의 후반부는 유명 영화감독으로 성장한 토토가 지나간 추억의 영화 속 키스 장면을 바라보며 아름답게 끝을 맺었다.

 

이 장면을 처음 보았을 때는 언뜻 두 배우가 가진 외모의 상이성이 눈에 들어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무엇에 홀린 것처럼 오히려 애잔하게 보이며 30년이란 시간이 정말로 아무런 이질감 없이 영화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이 장면은 영화의 2시간 러닝 타임 가운데 거의 30여 분을 남긴 후반부에 나왔다. 매우 중요한 타이밍이었다.

 

토르나토레는 여기서 압축의 기법을 사용했다. 귀향에 담긴 의미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다. 시간만을 압축해 관객에게 아름답게 표현할 뿐이었다.

 

만약 토토가 마을을 떠난 이후 영화감독으로 성공하는 과정을 그린 몇 장면만 넣었어도 <시네마 천국>은 명작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토르나토레는 불필요한 것을 모두 드러냈고 그 여백을 인상적인 11초로 관객에게 세련되게 압축시켰다. 요즘 이렇게 시간의 추이를 압축하는 장면은 다른 영화나 TV 드라마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시네마 천국>처럼 멋지게 30년을 수 초 만에 담은 화면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그만큼 인상적이었다.

 

(사진 출처 및 권리= 영화 <사도>공식 홈페이지 포스터)

 

최근에 이런 영화의 압축과 삭제 기술을 국내 영화를 통해서도 체감했다. 흥행 가도를 질주하고 있는 이준익 감독의 영화 <사도>였다. 차이가 있었다면 토르나토레가 특정 장면의 압축을 통해 영화 전체로 분위기를 확대했다면, 반대로 이준익 감독은 전체 스토리를 압축해 뒤주의 죽음으로 대표되는 특정 장면의 분위기를 극대화했다는 점이었다.

 

사실 <사도>의 줄거리는 모두가 익히 아는 사도세자와 영조의 이야기다.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과 반목으로 아들이 뒤주에서 죽은 조선왕조 최대의 비극으로 수많은 미디어가 재생산한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다.

 

이준익 감독은 이 진부한 스토리를 영화로 어떻게 새롭게 풀어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을까. 크리에이션이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사도>의 제작기 영상에 답이 있었다. 그의 말에서 단어 하나가 유달리 귀를 사로잡았다.

 

도대체 아버지는 아들을 왜 죽였는가. ‘현재와 과거가 병렬로 진행되면서 56년의 이야기를 2시간 안에 압축해서 전달하면 그 3대에 걸친 이야기가 사도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되겠구나. 그것이 사도세자 이야기의 진부함을 훨씬 뛰어넘을 수 있는 결과가 될 것이다라는 확신 때문에 영화를 찍게 됐죠.”

 

이준익 감독이 고른 창의성 기법은 압축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영화 <사도>는 영조(송강호 분)와 사도세자(유아인 분)의 8일 간의 숨 막히는 갈등을 그린다고 홍보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이 둘의 진짜 스토리는 8일의 단막극이 아니다. 감독의 말처럼 무려 56년의 시간이 쌓아온 장편 비극이었다.

 

그 과정을 다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왜 죽였는가에만 초집중하여 이야기를 풀어 가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동안의 사도세자 이야기는 보통 역사 안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단편적인 에피소드로 다루는데 그쳤다. 그러나 이준익 감독은 이 비극에 극도로 미세한 현미경을 들이밀었다. 더 자세하게, 더 세밀하게 인간의 마음을 심층적으로 파고들어 스토리를 전개시켰다.

 

그래서 영화를 다 보면 <시네마 천국>11초로 30년을 표현한 것처럼 56년의 시간 간격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노년이 된 영조의 특수분장을 통해서만 세월을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2시간 내내 유연한 긴박함이 요동친다. 뒤주라는 죽음의 공간을 클로즈업하며 비극의 이유에 대한 해답을 심도 있게 역추적 한다. 철저하게 부자의 심리 추이를 현재와 과거를 교차로 배열해 압축 연결한 이준익 감독의 연출이 돋보였다.

 

56년을 2시간으로 압축하려면 영화의 구도와 맞지 않는 내용의 삭제는 필연이었을 것이다. 영화 <사도>는 자막에 서울대 국문과 정병설 교수의 저서 <권력과 인간>을 참고문헌으로 밝히고 있다. 책에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세자의 지위에서 끌어내리면서 쓴 폐세자반교에 근거해 사도세자가 죽인 무고한 사람이 100여 명에 이른다는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실제 영화에서 사도세자의 살인 행각은 상당 부분 축소돼 있다. 영화 안에서 부자가 그리는 팽팽한 갈등의 대등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굳이 세자의 살인 행각을 모두 그릴 이유는 없었다. 삭제되고 압축됐다.

 

(사진 출처 및 권리= 영화 <사도> 공식 제작기 영상)

 

영화는 2시간의 시간 예술이다. 원래 시간의 속박을 받지는 않지만 대략 러닝타임 120분 내외에서 제작되기 마련이다. 지난해 흥행 톱10 영화의 평균 러닝 타임도 평균 130.2, 관객 50만 명 이상의 영화를 대상으로는 117.9분이었다. (맥스무비 영화연구소)

 

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은 이점을 오래전에 간파하고 모든 영화의 길이는 반드시 인간 방광의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위트 있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The length of a film should be directly related to the endurance of the human bladder.”)

 

2시간이란 시간은 2008년 영국에서 발표됐던 현대인이 최대한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57초에 비해서도 상당히 긴 시간이다. 영화가 지루하면 관객에게 외면 받고, 참신하지 못하면 수많은 영상 매체 속에 매몰된다. 영화 감독이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 5분 7초를 효과적으로 이어붙여 2시간으로 확대하지 못하면 인간 방광의 한계는 더 짧아질 수 있다.

 

그래서 영화는 120분 안에 감독이 어떤 시선과 창의성으로 역량을 펼쳐내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사도>의 이준익 감독은 효율적인 삭제와 압축의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봤고, 10년 만에 다시 꺼내든 진부한 사극을 통해서도 어떻게 연출하느냐에 따라 관객에게는 전혀 새로운 창조물로 탈바꿈 될 수 있음을 인상적으로 보여줬다. 압축을 택한 그의 확신은 정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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