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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기법

<어셈블리>가 남긴 명대사, 이유 그리고 울림

 

(사진 출처 및 권리= KBS)

 

[정현민 작가가 탄생시킨 명대사는 왜 명대사인가]

[정재영의 마지막 연설 장면과 역대급 명연기]

 

드라마나 영화 속 명대사가 책에 쓰인 텍스트 이상 위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자극하기 때문이다.

 

또한 보다 직접적으로 가슴 안에 파장을 남긴다. 보면서 듣는 행위는 읽고 느끼는 시간의 속도보다 빠르다. 그래서 가치가 있다. 하지만 보고 듣는 아무 대사가 명대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감동도 있어야 하고 재미까지 가미되면 더 좋다.

 

하지만 싱크탱커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명대사가 가져야 할 가치는 실용성이다. 감동과 재미를 단순하게 느끼는 것을 넘어 실생활에 소위 써먹을 수 있다면그 대사는 더욱 훌륭한 명대사가 된다. 명대사가 실용성을 갖춘다는 것은 드라마나 영화가 현실의 반영이라는 거울의 측면에서도 합목적적이다. 대부분의 현실과 괴리된 대사는 명대사로 살아남지 못한다.

 

그래서 조금은 부끄러운 과거지만 나는 오래전에 영화 <카사블랑카>의 명대사를 이용해 헤어 질 뻔 한 여자 친구를 붙잡은 적이 있었다.

 

영화에서 험프리 보가트가 잉그리드 버그만에게 했던 약혼자와 함께 비행기에 오르지 않으면 오늘이나 내일은 아니더라도 곧, 그리고 평생 후회할 거야”(maybe not today, maybe not tomorrow, but soon and for the rest of your life)”라는 명대사를 비틀어 반대로 나와 헤어지면 후회할 거야로 바꿔 현실에 실제로 적용시켰다.

 

이 명대사가 위력을 발휘한 이유는 역설법과 점증법이라는 2개의 수사법을 적절히 녹였기 때문이다. “약혼자와 함께 비행기에 오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거야라는 문장에서 초점은 약혼자와 비행기에 올라야 한다는 앞부분이 아니라 평생 후회할거야 라는 뒷부분이다. 여자로 하여금 마치 평생 후회할 일을 해서는 안 될 것 같기 때문에 비행기에 오르고 싶지 않다는 의미를 남자는 역설적으로 전달한다.

 

여기에 남자는 오늘은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 내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마지막에 평생 후회할 것이다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는데, 최대 48시간이었던 후회의 유통기한을 갑자기 확 뛰어넘는 평생이라는 시간을 꺼내 후회를 녹이니 역시나 후회할 행동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약한 음으로 시작하다 점점 소리가 커져 마지막에 빵 터뜨리는 음악의 크레센도가 됐다.

 

국내에도 이 같은 명대사를 드라마를 통해 자주 보여주는 작가가 있다. 정현민 작가다. 그가 만든 명대사에는 이유가 있고 울림이 있다. 정현민 작가에 대한 느낌과 이야기는 이미 아래의 지난 글(<어셈블리>는 왜 명품 드라마인가) 에서 자세히 썼기 때문에 생략하겠다.

 

 

다만, 한 가지만 더 언급하겠다. 왜 정현민 작가가 만든 대사가 명대사였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는 지난해 화제를 모았던 KBS 드라마 <정도전>의 마지막 대사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대들에게 명하노라. 저마다 가슴에 불가능한 꿈을 품어라! 그것이 바로 그대들의 대업, 진정한 대업이다!”

 

이 대사가 인상적인 이유는 불가능한 꿈이 대업이라는 착상이었다. 만약 이 대사를 가슴 안에 희망찬 꿈을 품어라라고 했다면 코미디가 됐을 것이다. 대업이라는 의미도 힘을 잃었을 것이다.

 

원래 불가능한 꿈은 꿀 이유가 전혀 없다. 꿈은 이루어지라고 있는 것이다. 불가능한 꿈은 망상이다. 하지만 정현민 작가는 이런 꿈의 성격과 크기를 반어적으로 불가능함으로 규정해 꿈의 가능성과 목표를 무한대로 확장시켰다. 그때 대업은 진정성을 오히려 크게 얻었고 저마다 이루고자 하는 가슴 속 꿈을 꿈틀거리게 했다. 정현민 작가는 화려한 미사여구가 아니라 군더더기를 뺀 언어의 짧은 조합만으로도 충분히 명대사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1720회를 마지막회로 종영한 <어셈블리>도 정현민 작가의 명대사는 넘치고 넘쳤다.

 

하지만 드라마의 시청률은 좋지 못했다. 주인공 진상필 의원의 지나친 공명심 때문에 몇 장면은 다소 부담스러웠다. 또한 19회에서 아무리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라도 해도 여당 의원이 야당 대표에게 울면서 무릎까지 꿇는 비현실적인 장면에는 고개도 갸우뚱해졌다. 정현민 작가 스스로 박춘섭 의원의 말을 빌려 감성팔이에 치우친 포퓰리즘으로 반대 논리를 경계하는 안전장치를 썼지만 설득 방법으로는 정치드라마답게 더욱 전략적인 접근이 아쉬웠다.

 

이상 언급한 내용은 <어셈블리>의 옥에 티였다. 티를 제외하고는 모두 훌륭했다. 내용, 연기, 구성, 메시지까지 명품드라마의 전형을 보여줬다. 뒷받침은 역시 다양한 명대사들이 큰 역할을 했다. 그래서 그동안 어셈블리에 나온 명대사들과 함께 나의 간략한 단평을 소개한다.

 

싱크탱커가 <어셈블리> 명대사를 기록하는 이유는 이미 설명했다. ‘실용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실용성은 창의성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당신이 어느 학교, 어느 직장, 어떤 직위에 있든 아래의 대사들을 자신이 명대사로 느끼고 활용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사진 출처 및 권리= 어셈블리 공식홈페이지, KBS)

 

- 드라마 <어셈블리> 명대사 모음 -

 

소신은 꺾으라고 있는 겁니다.”

 

말도 되지 않는 소신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때 쓸 수 있는 말이다. 소신 위치에 다른 단어가 있어도 마찬가지로 쓸 수 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을 정계에 끌어들였다.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끝까지 거절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게 인간이 권력과 사귀는 방식이야.”

 

인간이 권력과 사귀는 이런 종류의 방식은 인생사 어디에나 있다. 거절하다 결국은 거절하지 못한다. 유혹이 대표적이다. “그게 인간이 유혹과 사귀는 방식이야로 바꿀 수 있다.

 

인생과 정치는 정답이 없고 선택만 있다. 그 선택을 정답으로 만드는 게 인생이고 정치다.”

 

이 문장은 자체로 그냥 멋지다. 너무 멋져서 할 말이 없다. 정말로 인생은 선택만의 연속이다.

 

여보세요! 무슨 당이요? 뭐 봉숭아 학당이요? 맹구세요?”

 

기발한 언어유희. ‘이라는 말에서 봉숭아 학당을 끌어내 맹구까지 등장시켰다.

 

지금 건방지게 나에게 설교하는 거야?”

잘 아시네요. 설교하는 거예요.”

이런 친청계의 허수아비 같은 놈이...”

그럼 당신은 반청계의 아바타냐? 아바타 영화 보기는 봤나? 못 봤겠지. 아주 접대 받고 쳐 노시느라고.”

 

상대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 역으로 똑같이 되돌려 준다. 아바타가 SF영화에서는 멋있게 쓰였지만 여기서는 코믹하게 옷을 갈아입는다. 단어는 맥락에 따라 완전히 의미가 달라진다.

 

정치에 정답은 없어도 오답은 있습니다. 저는 총장님의 발언이 오답이라고 확신합니다.”

 

자신이 새롭게 어떤 개념을 정의하고 스스로 그 정의대로 움직이면 행동에 일관성이 있어 보이는 착각 효과가 있다.

 

진정한 승부사는 패배가 만들어내는 겁니다.”

 

짧지만 멋있는 문장이다. 패배가 만들어내는 승부사는 강하다.

 

난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사람의 욕심을 믿죠. 욕심을 통해 그 사람의 행동을 예측하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죠.”

 

매우 심도 깊은 문장이다. 사람의 욕심을 통해 그 사람을 예측한다는 것은 사회생활의 고수들이 쓰는 고난도 기술이다.

 

정치를 외면한 대가는 가장 저질스런 사람들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플라톤

 

플라톤의 명언을 최인경 보좌관(송윤아 분)의 목소리를 통해 방송에 소개됐다. 투표 참여를 독려하는 선거철에 많이 나온다. 투표와 관련해 권리 위에 잠자는 사람은 보호하지 않는다와 유사하게 쓰인다. 후자는 역시 정현민 작가의 드라마 <프레지던트>에서 최수종의 목소리로 방송됐다.

 

(사진 출처 및 권리= 어셈블리 공식홈페이지, KBS)

 

여기가 무슨 군대입니까. 무슨 당론이면 똥이든 된장이든 주는 대로 다 받아먹어요? 똥인데?”

 

난 이미 이 대사를 어디에서 써먹었다. 조직이 불합리한 내용을 자신에게 강요할 때, 누군가가 말도 안 되는 것을 자신에게 요구할 때 쓰면 효과적이다. 주는 대로 다 받아먹는 사람은 똥 먹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위력이 크다.

 

어제는 그렇게 떠들어대더니 오늘은 왜 입을 싹 닫으세요? 무슨 꿀 드셨어요?”

 

입을 싹 닫은 이유를 로 추측한다. 여기서의 꿀은 달지 않다. 비리나 각종 검은 커넥션의 쓴 액체이다. 꿀 먹은 병아리에서 발전된 표현이다.

 

여보세요! 저 시의원 아닙니다. 저 구의원 아닙니다. 국민들 전체를 생각해야 되는... 그런 국회의원입니다. (중략) 국회의원 처음 되면요. 처음 돼서 하는 선서가 있는데, 거기 뭐라고 써져 있냐면... 국민의 자유와! 복리증진! 국가의 이익에 우선!... 양심! 3가지가 골자예요.

 

저요. 지역 이기주의에 앞장서는 그런 영업사원 아닙니다. 저요!! 나라 전체와 국민을 함께 생각하는...그런 진짜 국회의원! 저요!!! 정말 국민들한테 떳떳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그런... ...진짜 국회의원이 되고 싶습니다.”

 

지난 포스팅에서 언급했듯이 각론에서 막힐 때 총론으로 밀어붙이면 논리의 돌파구가 열릴때가 있다. 지역구 국회의원이 대한민국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자고 할 때 반대하는 국민은 치졸한 국민이 된다.

 

철새 정치인이라는 손가락질은 두렵지 않으세요?”

날개가 꺾여 날지 못하는 새보다는 낫잖아. 새는 날기 위해 존재하는 거니까.”

 

상대의 논박을 그대로 받아 되돌려 주는 표현이 <어셈블리>에는 자주 나온다. 철새 정치인은 분명 나쁜 것인데, 이 말을 들으면 이상하게 철새에게 설득된다.

 

수락하면 평생 재기할 수 없도록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엄중한 경고다. ‘평생이라는 시간은 누구나에게 큰 압박감을 준다.

 

난 안할 테니까 아주 그냥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 끝나고 ~’ 소리 날 때까지 사무총장 하세요.”

 

재치 있는 비유였다. 애국가 끝나고 삐 소리는 마지막의 의미 없는 시간을 대표한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지, 아무데나 막 뻗습니까. 뱀 나오는데. 물려~ 깨물려.”

 

흔하게 쓰이는 관용적 표현을 정현민 작가는 한 단계 더 발전시킨다. 거기서 예상외의 재미있는 문장이 나온다. 정말로 뱀 나오는데 다리 뻗으면 큰일 난다.

 

(사진 출처 및 권리= KBS)

 

동지란 아무리 험한 가시밭길도 기꺼이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중략) 굳이 말하자면 동업자였을 겁니다. 목표했던 이익 달성에 실패하면 언제든지 계약 파기가 가능한.”

 

철저하게 감성을 억제한 냉혈인 백도현 사무총장(장현성 분) 같은 캐릭터의 사람이 표현할 수 있는 대사다. 계약 파기가 가능한 동업자는 그때부터 동업자가 아니다. 누군가와 선을 확실히 긋고 싶을 때 쓸 수 있다.

 

제가 당하고만 있을 것 같습니까. 저 변호사입니다.”

으하하하 홍의원, 우리가 사는 곳은 법정이 아니고 여의도야. 미모를 앞세워 인기를 얻은 여성 대변인 하나 바보로 만드는 것 일도 아닌 곳이라고.”

 

박춘섭 의원을 연기한 박영규는 <정도전>의 이인임이었다. 조용한 듯 하다 툭 던지는 언어가 소름을 끼칠 정도로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내가 누군가를 바보로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닌 사람이라고 스스로 규정하는 것은 바보로 될 수 있는 누군가에게 부담감을 준다.

 

또 시간을 끌자는 겁니까.”

더 알찬 열매를 맺기 위해 잡초부터 제거하자는 얘기입니다.”

 

간단하지만 매우 쉽게 시간을 끄는 이유가 납득되는 설명이다.

 

생각해보니까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하나 있더라고. 약속 지켜주는 거요, 배신 안 하는 거요. 맨날 속고 속이고만 살아온 사람에게 믿을 만한 사람 돼주는 거요.”

 

실제로 사회생활에서도 신뢰가 바탕이 되면 배신이 설 자리는 없다.

 

저는 좌파, 우파 다 하는 양판데요. 아주 까면 깔수록 새로운. 굳이 제 이념을 듣고 싶다면, 저는요. 그냥 사람입니다. 사람. 사람이 좀 사람답게... 좀 믿고! 사이 좀 좋게! 뒤통수 좀 안치고 제발 서로 안 싸우고! 안 울리고! 그냥 그렇게 손 좀 잡고 같이 걸어가는 거... , 그게 제 정치 이념입니다.”

 

휴머니즘을 양파라는 언어유희를 또 한 번 이용해 코믹하게 표현했다.

 

총선용 얼굴마담 홍찬미, 금배지 거저 주는 홍찬미, 조만간 이월 상품 될 거 4년 뒤에는 땡처리 폭탄세일 매장에 쳐 박힐 홍찬미. 그래서 공천에 목맸나봅니다. 그 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시간이 지나 폭탄세일 땡 처리 되는 000. 백화점 상품을 인간에게 대입해 의인화 시켰다.

 

(사진 출처 및 권리= 어셈블리 공식홈페이지, KBS)

 

이제 절대로 타협은 없습니다. 설령 우리 팔 다리 한쪽이 잘려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엔 반드시 백도현이 목을 취할 겁니다.”

 

자주 쓰는 표현이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인데 한 발 더 나아가 을 취한다고 하니 더 무섭다.

 

깃털이 저리 딱 버티고 있으면 몸통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깃털을 뽑아놨으니 삶아먹으려고 드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나. 우린 그저 숟가락만 씻어놓고 있으면 돼.”

 

이 대사를 쓰기 위해 다소 의도적으로 만들었다는 작위적 느낌이 없지 않지만, 전략적 멘트로는 손색이 없다.

 

백총장, 더 이상 추해지지 맙시다. 백총장이 진짜 VIP측근이라면 측근답게. 부담되지 말고 정리하세요.”

 

대통령 비서실상의 대사였다. “더 이상 추해지지 맙시다는 여러 가지에 적용 가능한 점잖으면서도 강력한 경고다.

 

눈치 빠른 사람이니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잘 알거라 믿네.”

 

함축적 경고다. 그러면서도 경고에 품위가 있다. 대통령이 사무총장에 보낸 문자 메시지였다.

 

배달수씨는 누구보다도 훌륭한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패배 때문에, 그 패배 때문에 너무나도 허무하게...속절없이 무너져 내린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만약에 그 사람한테... 단 한 번의 기회만 더 주어졌다면, 아니죠.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그런 믿음만 있었더라면! 그 높은 크레인 위에 올라가지 않았을 거라고... 저는 분명히 생각합니다.”

 

반복을 통한 멋진 표현이다. ‘패배’, ‘기회’, ‘기회가 주어진다는 믿음앞에 단 한 번이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되풀이해 의미의 소중함을 더했다.

 

어째서 부자를 돕는 것은 투자라 하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비용이라고 합니까! ! 패자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는 게 어떤 투자보다도 더 가치 있는 투자라고... 저는 그렇게...그렇게 믿습니다. 그리고 저 진상필, 노력하지 않아서,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그래서 경기에 패배한 선수들까지 보듬자는 얘기 아닙니다. 배달수씨처럼 정직하게! 배달수씨처럼 규칙을 지키면서! 배달수씨처럼 최선을! 최선을 다한 패자들, 그런 사람 보듬자는 얘깁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지금보다는 좀 더 따뜻해질 거라고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던 빈민가 출신의 35대 브라질 대통령 룰라 다 실바의 명언을 효과적으로 인용했다. ‘부자에겐 투자, 가난한 자에겐 비용이라는 개념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약자의 편에 서게 만든다. 원래 사회적으로 약자 편에 서는 논리를 펴는 것은 강자를 대변하는 것 보다 내용도 많고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다만, 어떻게 설득할 것이냐의 문제에 있어서는 기술적인 세심함과 새로움을 요구한다. 이런 작가의 역량이 그대로 드러난 명대사다.

 

국민 여러분. 그동안 저는 국민들을 속이고 또 저를 속였습니다. (중략) 국민여러분. 그동안 저는 제가 서있는 이곳이 어셈블리, 즉 국민의 대표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았습니다. 저의 초심을 일깨운 배달수법과 그 법을 주도하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백도현 총장은 마지막회의 반전 속에서도 끝까지 냉정함과 품격을 잃지 않았다. 감정을 절제하고 건조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장현성의 연기가 돋보였다. <어셈블리>라는 드라마 제목의 뜻을 다시 한 번 명확하게 풀어 설명해 드라마가 가졌던 원초적 존재감을 확인시켰다. 이처럼 순간적으로 개념을 정확하게 정의하는 장치는 주의를 환기시키는 효과가 있다.

 

(마지막 연설에서 혼신을 다한 연기를 보여준 정재영, 사진= KBS)

 

저 원래 용접공이었습니다. 저 용접 엄청 좋아합니다. 왜냐면요. 용접은 붙이는 거거든요. 그 어떤 쇳덩어리가 와도 다 녹여서 붙이는 거거든요. 저는요. 정치도 용접 같은 거면 좋겠습니다. 경상도 전라도도 붙이고,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도 붙이고, 승자하고 패자도 붙이고, 그렇게 붙이고 붙여서 서로 하나가 되는 그런 나라를 만드는 게! 정치였으면 좋겠습니다. 배달수법도 그런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박춘섭 의원님. 국가가 물주가 아니라고 하셨죠. 그럼 국민은 물주입니까? 물주에요?..!!! 우리 국민들이요. 뼈 빠지게 일하고, 나라 지키고!... 세금도 냅니다. 그게! 국민의 의무라고 헌법에 나와 있으니까!

 

배달수씨도 그래요. 평생 뼈 빠지게 배만 만들고, 군대도 갔다 오고! 갑근세도 꼬박꼬박 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어느 날 갑자기! 길거리로 내팽겨 쳐졌어요. 그 사람 누가 일어서게 도와줍니까. 누가 일어서게 도와줘요? 국갑니다. 국가에요!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는 게 국가의 의무니까. 국민들이요 호구도 아니고요 물주도 아니에요. 국민들은 이 국가의 주인입니다! 그래서 저는요, 국민들에게 믿게끔 해주고 싶어요. 국가가!! 나를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고!! 국가가!!! 내가 쓰러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게 도움을 준다고!!

 

그래서 나는!!...나는...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에서 내가......지금도 앞으로도 행복해 질 수 있다고!!...저요. 이 딴청계 대빵 진상필! JSP 제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국민이!! 국민의 의무를 다했을 때는 국가가!... 국가가 의무고!! 국민이 권리입니다!!!

 

이 긴 어셈블리의 마지막 대사를 정재영이 토해내는 데 정확히 52초가 걸렸다. 20부작 드라마의 마지막 순간, 드라마에 참여한 모든 연기자와 제작진들이 자신들의 모두를 하얗게 불태우듯이 다 쏟아낸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재영의 연기, 정현민 작가의 대사, 감독의 장면 연출, 심지어 엑스트라와 조연들의 박수 연기까지 드라마의 마지막이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줬다.

 

대사의 구성을 보면 드라마 줄거리와 조금씩 드러났던 주제의식의 총정리나 다름없다. 용접공이었던 주인공 진상필이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면서 시작한다. 그런데 용접과 정치를 크로스오버 시킬 때부터 심상치 않다. 듣다보니 정말로 수긍이 간다. 쇳덩어리가 붙는 것처럼 강자와 약자가 붙고, 모두가 붙어 하나가 된다는 표현은 완전히 이질적인 용접과 정치라는 개념을 통해 동질성을 끌어낸 매우 수준 높은 결합이다.

 

연설 내용을 음미해보면 의외로 큰 반전이 숨어있었다. 처음에 진상필 의원이 드라마 후반부부터 패자부활 법을 들고 나온 것은 국가가 보듬어야 할 국민’, ‘약자를 도와주워야 할 국가에 초점이 있었다. 무언가 배달수 법의 국민은 국가라는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아야 할 소극적 국민’,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더 이상 일어설 수 없다는 자조적 국민이었다.

 

하지만 진상필 의원의 연설 속 국민은 이런 국민이 아니었다. 초등학생이라면 누구나 아는 국민의 권리와 의무라는 쉬운 단어의 의미를 뒤집어 적극적 국민으로 탈바꿈 시켰다. “나 이렇게 최선을 다했으니 국가인 너도 나에게 잘해라라는 당당함이었다.

 

실패했다고 국가에 기대는 국민도 아니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국민의 의무를 다했다. 그럼에도 내가 실패했다면 국가인 너는 내가 재기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을 요구할 권리를 나는 갖는다. 따라서 반대로 국가인 너는 나를 도와야 할 의무를 지게 된다. 그것이 국민이 국민의 의무를 다했을 때는 국가가 의무이고 국민이 권리이다라는 명대사로 최종 마무리가 됐다.

 

드라마를 비롯해 각종 창조물이 마지막에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남기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표현 기법에 따라 오래도록 여운과 파장을 남긴다는 점에서 정현민 작가는 끝내기 기술자였다. <정도전>의 마지막회 마지막 대사에서 조재현이 불가능한 꿈, 대업을 외치며 죽었던 것처럼, <어셈블리>에서도 마지막은 정재영이 링컨이나 케네디의 명연설을 방불케 하는 국가와 국민이 가지는 권리와 의무의 역전을 통해 시청자들의 가슴에 깊은 인상을 새겼다.

 

마지막으로 정재영의 연기는 감동이라는 수식어만으로는 부족했다. 최근 5년간 내가 본 모든 드라마와 영화 속 주인공 연기 가운데 단연 최고였다. 1단계 기어부터 최고로 오버하는 10단계의 기어를 자유자재로 상황에 맞게 변속했다.

 

특히 정재영이 연설 중 울먹이는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진상필 의원의 감정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현장에 있던 누구라도 박수를 칠 이유가 충분한 명연기였다. 작가가 아무리 뛰어난 착상과 명대사를 만들어도 그 창조물을 표현하는 주체가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다면 그때의 명대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마지막 연설 장면은 작가와 배우의 완벽한 하모니였다. 정현민 작가의 다음 작품이, 배우 정재영의 또 다른 역할이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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