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창조의 재료탱크>, ThinkTanker)
[빵장수 야곱, 평범함 속의 비범함]
강남역 지하에 지금은 사라진...‘동화서적’이란 서점이 있었다.
아마 동화서적을 기억하시는 분들이라면 강남역이라는 분주함 속에 조용히 책이 주는 고요함의 공간을 홀로 제공했던 서가의 추억이 생각날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 이곳에서 한 권의 책을 샀다.
도대체 내가 왜, 또 무엇에 이끌려 이 책을 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렴풋이 이 책의 뒤표지에 소개된 일화가 재미있었던 것이 동심을 자극한 유일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어느 빵장수가 새벽녘 아무도 모르게 일어나서 마을 빵가게의 오븐에 불을 지핀다. 오븐이 달구어지고 첫 반죽이 부풀어 오르기를 기다리면서 빵장수는 하느님의 세계와 삶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적곤 했다. 어느날 그가 조심스럽게 적어 놓은 쪽지 중의 하나를 무심코 빵 속에 넣은 채 구워 그것을 마을의 한 부인에게 팔게 된다.
그녀는 이 내용에 깊이 감명을 받아 주인에게 이런 쪽지가 들어있는 빵을 사서 마을 잔치에 쓰겠다며, 많은 양의 ‘쪽지 빵’을 특별 주문한다. 그리하여 빵장수의 비밀은 사람들의 귀에서 귀로 전해지게 되었고, 온 마을 사람들은 빵장수를 마치 오랫동안 묻혀있던 인간 보물이 갑자기 발견된 듯이 소중히 대하게 됐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
단순히 이 일화가 너무 재미있어서 아버지에게 사달라고 했다. (지나고 보니 이 일화는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전형적인 ‘스티커 메시지’였다. 이 책이 성공한 첫 번째 이유다.
(2015/03/18 - [스티커 메시지] - '배꼽 피어싱' 클럽 미녀의 진실과 메시지) 그야말로 충동구매였다.
그런데 막상 책을 구입하고 더 이상 그 책을 읽지 않았다. 이 책이 주는 메시지나 내용의 깊이를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성인이 되고, 책장 안에서 오랜 시간 잠자고 있던 이 책을 다시 읽고 나는 당시의 충동구매가 잘한 행동이었음을 느끼게 되었다.
책은 매우 평범한 텍스트였다. 일체의 현학적이고 어려운 단어는 단 한 글자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에게 ‘쪽지 빵’을 특별 주문하게 할 만큼의 큰 울림을 담고 있었다. 평범함 속의 비범함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어울리는 책이지만, 그 상투적인 특징마저도 따사롭게 껴안으면서도 지혜, 무지, 인내, 죽음 등에 대한 답을 정감 있고 소박하게 전달했다.
이 책의 제목은 <빵장수 야곱(Jacob the Baker)>(김영사)이다.
1989년 출간 이후 한국에서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출간 6개월 만에 무려 1백만 부가 팔렸다. 전 세계 40개 언어로 번역됐으며 출간 10년 뒤의 이야기를 담은 <빵장수 야곱의 영혼의 양식>이 출간되기도 했다.
철학자이자 명상가로 알려져 있는 저자 노아 벤샤는 실제로 빵장수이기도 한데, 현재는 세계적인 제빵회사 '뉴욕 베이글 팩토리'를 경영하고 있다.
이 책이 한국에서 성공한 두 번째 이유에는 책의 가능성을 알아본 김영사 박은주 대표의 남다른 감각이 있었다.
지난해까지 김영사 대표를 맡았던 그녀는 출판계에서 수식어가 많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출판CEO이면서도 ‘미다스의 손’이다.
1989년 32세에 김영사 사장이 되자마자 김우중 전 대우회장의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를 내면서 주목을 받았다. 김우중 회장의 자서전은 한국 최초의 밀리언셀러가 됐고(당시 이 책 안 산 사람을 거의 못 봤다.)
이어 <빵장수 야곱>,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까지 큰 성공을 거두면서 3권의 책이 모두 그해 베스트셀러 1~3위를 싹쓸이했다. 요즘에 한 출판사가 이렇게 같은 해에 3권이 동시에 금·은·동메달을 독식하는 것은 좀처럼 나오기 힘든 장면이다.
창작만이 크리에이터가 아니다. 누군가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그 가능성을 끌어내는 것도 크리에이터의 중요한 감각이다. 자신의 종교색이나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열린 사고로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것도 포함된다. 박은주 대표가 그런 사람이었다.
박은주 대표의 종교는 원래 불교다. 독실한 불자로 알려져 있다. 날마다 <금강경>을 독경하는가 하면, 지난해 ‘30년간 금강경 2만독’을 회향했다는 말로 불자CEO로서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다는 보도를 본적이 있다.
그런데 이런 박은주 대표의 종교와는 다르게, 역설적으로 그녀가 출간한 <빵장수 야곱>은 매우 기독교적인 서적이다. 책에는 수시로 하느님의 가르침, 하느님의 세계가 언급된다. 그럼에도 박은주 대표는 이 책을 기꺼이 출간했고 기독교적 가르침이 녹아있는 출판계의 역대급 서적으로 만들었다. 열려있는 사고가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사진: 책 뒤표지를 어떻게 디자인하는지는 그 책의 운명을 가르기도 한다. <창조의 재료탱크>, ThinkTanker)
사실 종교는 인간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지향점은 모두 같은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글에서 밝힌 적이 있지만, 나의 본질적인 종교는 기독교다. 교회도 나간다. (매주 갔던 적도 있지만 몇 년 전부터 매주 가지는 않는다. 죄가 너무 많이 쌓여져 마음을 청소해야 겠다고 판단되면 나간다! 물론, 일요일의 늦잠도 이유에 포함돼 있다.)
하지만 불교도 매우 좋아한다. 종종 가는 절도 있고 교류하는 스님도 있다. 그래서 나의 지인들은 그러면 당신은 진정한 기독교 신자가 아니고 나일론 신자라고 핀잔준다. 뭐, 그렇다고 해도 좋다. 어쨌든 나는 기독교나 불교나 모두 좋다. 둘 다 좋고 인간의 행복을 알려준다는 각각의 가르침을 굳이 거부하고 싶지는 않다.
종교는 사실 어려운 문제다. 정답도 없고, 결론도 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쯤에서 논의를 접겠다. 종교 때문에 국가가 전쟁도 하지 않는가.
아무튼, 이 책은 메시지를 다루는 기법, 쉬운 언어의 사용, 스티커 메시지로 동심을 자극해 충동구매로 이어지게 한 출판사의 감각, 그 출판사 대표의 열린 사고의 측면에서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만들어준 책이 됐다.
책에는 아래와 같은 짧은 내용이 있다.
두 사람이 야곱을 찾아와 누가 더 현명한지를 물었다.
“저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다 압니다.”
한 사람이 말했다.
“저는 무엇이 그른 것인지를 다 압니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
그러자 야곱이 말했다.
“그래요? 그럼 두 분을 합하면 현명한 한 사람이 되겠군요.”
<빵장수 야곱>은 이런 식이다. 선문답 같기도, 단순 말장난 같기도 하다. 이런 얘기 누구나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쉽지 않다. 읽어서 지금 그렇다고 알게 된 것이지, 막상 이런 깨달음의 이야기를 만들라고 하면 즉각적으로 튀어나오기 힘들다.
그래서 이 책은 위대하다. 성공한 세 번째 이유다. <빵장수 야곱>은 절대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책이 아니다. “현명함이란 옳고 그른 것을 모두 아는 것이다”라는 것을 단 6줄로 표현하는 데는 한 인간의 오랜 숙고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싱크탱커는 최근 이진아의 천재성을 언급한 포스팅 (2015/04/06 '내 마음 속 천재' 이진아, 기억할게요) 에서 천재가 되는데 필요한 노력의 시간을 말한 적이 있다. 모차르트는 18년, 타이거 우즈는 17년, 이진아는 20년이 필요했다. 이 책도 비슷했다.
이 얇은 한 권의 명저를 완성하는데 걸린 저자가 기울인 노력의 세월도...18년이었다.
By ThinkTan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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