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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기법

이어령의 100년 서재(8)(完), 종합 사고(思考)의 예술

 

(사진 출처 및 권리= KBS)

 

[크리에이터는 어떤 사고를 해야 하는가]

[모두가 알아야 할 한국 문화’, 한국인의 논리’]

 

이어령 선생은 사기꾼이었다.

 

강연 초반에 그는 사람들은 큰 생각만 하지 작은 생각들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유와 평화 등 큰 주제를 내가 이야기해야 관심을 갖고 사람들이 모인다고 했다.

 

그리고 정말로 매우 작은 젓가락을 소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생의 표현대로 가히 하찮고 쓸모없어 보이는 젓가락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나는 그 하찮고 쓸모없는 사물에 빠져들었다.

 

젓가락 안에는 문화와 역사가 있었다. 마술봉이자 타임머신이기도 했다. 수천 년전 무령왕릉 안에서 발견된 녹슨 쇠 젓가락부터 젓가락 끝의 센서로 음식 성분을 감지해 빅데이터까지 산출할 수 있는 ‘ICT 젓가락까지 최첨단 기술을 넘나들었다. 선생의 말처럼 젓가락 문화가 없는 미국의 애플은 따라할 수 없는 기술 같았다.

 

유전자도 있었다. 학습되는, 또 학습해야 하는 우리의 문화 유전자였다. 한자 ()’가락을 넣어 탄생한 젓가락이라는 단순한 언어를 통해 한국인은 남의 것과 내 것을 합쳐 주체적으로 문화를 받아들여 새로움을 창조하는 민족임을 알게 됐다. 그래서 수백 번 야구 중계를 봤어도 느껴지지 않았던 라인 선상이라는 말도, ‘동해바다’, ‘역전 앞’, ‘깡통이 국어적으로 잘못된 동어반복보다는 경이롭게 다가왔다.

 

(사진 출처 및 권리= KBS)

 

또한, 평생 젓가락으로 그렇게 많은 음식을 집어 먹었어도 나는 젓가락의 모양이 네모와 원을 같이 가지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았다. 그래서 젓가락은 천원지방(天圓地方)’으로 대표되는 사각형(땅)과 원(하늘)이 한 몸에 통합된 완성된 디자인이라는 것, 또 그것이 아름다움이라는 궁극의 디자인이라는 것도 느끼게 됐다. 이런 놀라움을 끌어낸 세밀한 관찰력에도 고개가 숙여졌다.

 

강연의 후반부에는 젓가락을 통해 세계로 눈이 확대됐다. 젓가락을 쓰지 않는 서양은 너는 먹는 사람, 나는 요리하는 사람이라는 의식이 있어 음식의 크기에 상관없이 알아서 칼로 잘라 먹어라는 문화가 있었다. 여기서 서양의 독립정신, 개인을 토대로 한 자유 문화가 연계성을 갖게 됐다.

 

반면 우리의 젓가락에는 네가 남이가가 스며있었다. 요리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먹는 사람이 한 입에 잘 먹도록, 한 젓가락으로 음식을 잘 집을 수 있도록 남을 배려하는 공동체 정신이 담겨있었다. 서양 문화와 우리 문화 사이에 우열은 없었다. 좋은 문화와 나쁜 문화도 없었다. 상황에 따라 다른 문제였다.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취사선택하여 적용하는 문화 수용의 유연성이 강조됐다.

 

강연의 마지막에는 인상 깊은 젓가락 체험 장면도 나왔다. 1미터가 넘는 젓가락으로는 스스로 음식을 먹기 어려웠지만, 서로서로 남이 그 긴 젓가락으로 집은 음식을 나의 입에 넘겨주자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소통이자 배려였으며 생명이자 천국이었다.

 

(사진 출처 및 권리= KBS)

 

지난달 31일 방송된 <이어령의 100년 서재> 10화 마지막회 생명의 젓가락은 그렇게 마무리가 됐다. 방송이 끝나고 나는 그 사기꾼에 속았다는 깨닫게 됐다. 선생은 큰 것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작은 젓가락 안에는 시간과 문화가 있었으며, 유전자가 있었다. 상상력이 춤을 췄으며 행복과 평화, 우리들이 나갈 미래의 거대함이 숨 쉬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나는 내가 누구인가를 자문했을 때 선생의 말처럼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 사람이었다. 그렇다. 나는 한국인이었다. 그것을 알게 해줘서 너무 감사했다. 강연이 모두 끝나고 결국 나는 이 사기꾼에게 감동받았다.

 

마지막회 방송은 종합 사고(思考)의 예술이었다. 이어령 선생은 이날 앞서 강연한 9개의 방송의 모든 창의성 기법을 젓가락 안에 한데 모아 발산하는 토털 싱킹의 아티스트였다.

 

호기심을 바탕으로 언어의 개념을 확장했으며 사물을 거시적으로, 때로는 매우 디테일하고 미시적으로 바라봤다. 사물과 현상의 관계를 설정하고 창조의 3각 기법으로 개념을 사슬처럼 이어 붙였다. 자신의 주장에 확신이 있었으며 용기 있는 논리를 펼쳤다.

 

(사진 출처 및 권리= <창조의 재료탱크> By ThinkTanker)

 

새삼 이어령의 100년 서재가 처음 방송된 여름의 끝자락이 생각난다. 당시 싱크탱커는 이 방송이 10회로 방송된다는 것을 알고 연재물로 포스팅 하겠다고 계획했다. 나의 좁은 시각으로 선생의 거대함을 정리한다는 것은 시작부터 넌센스였다. 하지만 나름대로 방송의 줄기를 창의성 기법으로 초점을 놓고 풀어나갔고 위의 표처럼 10개의 방송을 총 10개의 창의성 기법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그런데 혹시나 <창조의 재료탱크>에서 연재한 내용을 방송과 비교해 모두 보신 분이 계시다면, 표의 포스팅한 내용 가운데 2가지가 빠져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2흙의 마음과 지렁이 울음소리디테일’, 1빛이 돌아온 날논리.

 

먼저 2회의 디테일은 5, 살다에서 언급한 미시적 시각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어 따로 포스팅 하지 않았다. 하지만 광복절 즈음에 방송된 1회 내용을 뺀 것은 의도적이었다.

 

1회의 내용이 지금까지 방송된 10회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내용을 마지막 연재물에 포스팅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느꼈다.

 

<이어령의 100년 서재> 1빛이 돌아온 날에 등장한 창의성 기법은 논리였다. 크리에이터는 자신의 창조물이나 주장을 논리 있게 펼칠 수 있어야 한다. 논리에는 타당한 근거가 있어야 하고 그 근거가 설득력을 갖춰야 한다.

 

1회에서 이어령 선생은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알아야할 논리와 팩트를 방송에 소개했다.

 

선생은 90년대 중반 한국의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초청받아 일본 규슈에서 강연을 했다. 처음에는 규슈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문화 강연이었다. 그런데 일본 관계자는 정치 이야기가 아니므로 규슈의 시민까지 모두 듣게 하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선생에게 해왔다. 이것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강연은 규슈의 어느 강당에서 열렸다. 일본 시민들로 꽉 찼다. 하지만 역시나 강연 도중 갑자기 야쿠자 같은 흉악스런 용모의 남자 대 여섯 명이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며 이어령 선생에게 정치적인 질문을 해왔다. 이 질문에 대한 납득할 만한 답변을 당신이 하지 않으면 강당을 나가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질문은 3가지였다. 위안부가 강제였다는 증거를 대라. 한국은 왜 4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는가. 미군의 성범죄는 문제 삼지 않고 왜 일본의 위안부만 문제 삼는가.

 

(사진 출처 및 권리= KBS)

 

당신이라면 이 질문에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 과연 한국인은 일본인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해온다면 명확하게 답변할 수 있을까.

 

한국의 초대 문화부 장관 출신으로 일본에서 강연을 하는 자리였다. 자칫 여기서 답변을 못하면 망신도 이런 국가 망신이 없다. 만약 선생이 그 자리에서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당황했다면 일본은 또 얼마나 좋아하고 언론으로 떠들어댔을까. 그래서 야쿠자 퍼포먼스는 일본의 의도된 꼼수였다고 싱크탱커는 짐작한다.

 

하지만 선생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차분하게 3개의 질문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위안부의 증거를 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부터 충격적이었다.

 

바로 내 누이다!”

 

주변이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며 여기저기서 놀라움의 탄성이 나왔다. 선생의 누이가 역사의 증인이라는 사실에 그 순간 어떠한 공문서도 필요 없었다.

 

다정다감하고 서정시를 좋아하던 누이였다. 누이의 서랍 안에는 한 장도 뜯지 않은 바이올렛 빛 편지지가 있었다.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미래의 연인을 위해 소중히 간직한 편지지였다. 그러나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선생의 누이는 16살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다. 선생은 자신의 가슴 아픈 가족사를 공개하며 위안부 문제를 인간의 감성을 파괴한 반인륜범죄로 고발했다.

 

누구나 사랑하는 이와 결혼하는 꿈이 있다. 그러나 나의 누이는 떠났다. 당신은 그 의미를 아느냐. 당신이 공문서 대라고 하는데, 그 편지지가 공문서다.” 주변에서는 어떠한 반론도 제기하지 못했고 오히려 곳곳에서 눈물이 나왔다.

 

(사진 출처 및 권리= KBS)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도 거침없었다.

 

“4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폭력이다. 우리 누이 또래의 정신대에 끌려갔던 꽃다운 16살 소녀들이 여자가 어떻게 당했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가. 부모가 있고, 남편이 있고 자식이 있는 여자가 과거에 일본 군인들에게 몸을 버렸다는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성폭력을 당한 사람은 말하지 못한다. 이제 남편이나 가족들이 모두 떠나고 다 늙어서 더 이상 여자라고 말하기 어려워진, 여자의 수치심이나 부끄러움과 상관없는 나이가 된 할머니가 되어서야 40년이 지나고 내가 당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40년 지난 후에 위안부를 문제 삼는가라는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너희들이 히틀러보다 더 잔학한 짓을 했다는 것을 스스로 말하는 것이다.”

 

(사진 출처 및 권리= KBS)

 

세 번째 질문의 답변 또한 명쾌했다.

 

어떤 전쟁지역을 보면 성범죄가 있다. 생계를 위해 스스로 몸을 판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모두 개인의 문제다. 그러나 너희들은 일본군인 한 개인이 어떤 한국 여자를 성폭력 한 것이 아니라, 일선 군인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마치 건빵 배급하듯이 여자들을 집단적으로 동원한 국가 주도의 조직적인 범죄다. 내가 아는 한 로마시대부터 현대까지 (이런 만행은) 너희들이 처음이다. 국가가 당연히 책임져야 할 문제다.”

 

감성을 자극하며 시작된 답변이 대응할 수 없는 완벽무결한 논리를 바탕으로 차갑고도 간명하게 청중들의 폐부를 찌르자 야쿠자들은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고 사라졌다.

 

그리고 모든 강연이 끝나자 일본의 청중들은 모두 도열해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하세요”, “스미마셍을 연발하며 선생에게 고개를 숙였다. 나중에는 한국에 돌아간 선생에게 죄송하다며 편지까지 보낸 일본인도 방송에 소개됐다.

 

이 일화와 일본의 저급한 질문에 통쾌하게 답변하는 선생에 모습에, 그리고 국가를 대표하는 크리에이터의 자신 있는 논리에 나는 가슴이 한동안 뭉클해졌다. 한국인의 정체성에 강한 힘을 불어넣는 선생의 명강연 1회 방송을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아껴두었다.

 

(사진 출처 및 권리= KBS)

 

이제 10회 분의 방송을 모아놓고 보니 <이어령의 100년 서재>는 창의성에 관한 종합 선물세트가 됐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위대한 크리에이터가 우리가 살아온 70, 앞으로 살아갈 30년을 창조적 시각으로 풀어갔다.

 

방송의 구성과 연출(책임CP 민승식, 연출 송영석, 오은일, 이해돈) 역시 훌륭했다. 최근 5년간 싱크탱커가 접한 다큐멘터리 및 기타 강연 프로그램 가운데 단연 최고였다. “내가 올해 잘 한 행동 가운데 한 가지는 이 방송을 본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명품이었다. 책임 프로듀서와 핵심 스태프 말고도 카메라, 세트, 편집, 컴퓨터 그래픽 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했을 많은 스태프들의 땀이 프로그램의 품격을 높여줬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음악(음악감독 이유미)이었다. 방송에 소개된 많은 음악들은 화면의 메시지, 주제의 분위기와 절묘하게 녹아들며, 마지막 음악 'That's What Friends Are For'까지 줄곧 인간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줬다.

 

이제 겨울이 다가오는 문 앞에서 방송은 모두 종료됐다.

 

마지막회 방송에서 선생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100살 절대 못살 겁니다. 유일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내 작은 말의 씨앗들이 싹터서 세대에 전해진다면 젓가락이 끝없이 내려와 오늘까지 존재하듯이 내 말 역시 하나의 씨앗이 돼 10002000년 전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노년의 크리에이터는 생명의 유한함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창조의 영원함도 웅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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