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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기법

'폭로 전문' 디스패치의 영리한 창조적 전략

 

(이하 사진: 디스패치 홈페이지)

 

 

[디스패치의 전략과 특종은 무엇이 다른가]

 

기사는 놀라운데, 그 기사를 보도한 주인공은 이제 놀랍지 않다.

 

디스패치(Dispatch).

 

언제나, 거의, 늘 그렇다. 연예 분야에서 [단독], [특종] 이런 꺽쇠가 붙은 인터넷 뉴스를 클릭하면, 단독이나 특종이라는 꺽쇠의 값어치를 가장 크게 느끼게 만든 기사의 바이라인은 대부분 디스패치다.

 

사람들의 반응도 뜨겁다. 23일이 대표적이다. 이날 오전 연예기사의 가장 큰 이슈는 류수영과 박하선의 열애 보도였다. 디스패치의 기사가 나오기 전까지만 그랬다.

 

디스패치가 이후 보도한 이민호, 수지의 열애설 기사는 한 방에 모든 상황을 종료시켰다. 유수영-박하선 커플은 존재감 없이 인터넷에서 그대로 묻혔다. 이 두 쌍의 커플 가운데 어떤 커플이 비교 우위에 있냐고 따지는 것은 넌센스다. 다만 국민 첫사랑이 누구인지 또 그 국민 첫사랑의 열애 상대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사람들이 느끼는 관심의 비교우위는 존재한다.

 

디스패치는 여기서 승리했다. ‘더욱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어떤 커플이 주는 선택의 문제에서 그들은 타 매체보다 한 발 앞서 있었다.

 

기억에서 떠오르는 디스패치의 보도는 이 뿐만이 아니다. ‘비와 김태희의 열애설’(201311), ‘원빈과 이나영의 열애설’(20137), ‘이승기와 소녀시대 윤아의 열애설’(201411), ‘김연아와 김원중의 열애설’(20143), ‘이정재와 임세령의 열애설’(201511) 등 네임밸류와 팩트밸류가 모두 높은 기사의 파노라마였다.

 

싱크탱커는 이런 디스패치를 크리에이터라 규정한다. 그들이 그동안 어떠한 언론, 매체, 보도기관에서도 해내지 못한 무수한 사실들을 폭로했다는 이면에 담긴 그들의 영리한 창조적 전략 때문이다.

 

확실한 보여주기

 

(사진: 디스패치 홈페이지)

 

디스패치는 시각적 기법에 매우 능하다. 시각은 인간의 5감 가운데 창조적 기법으로 활용하기에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감각이다. 탐사보도의 방식은 여러 가지지만 탐사라는 언어가 주는 약간의 을 갖추기 위해서는 눈으로 즉각적으로 보이는 시각보다는 시간을 두고 뇌 혈관을 쓰게 하는 분석적 텍스트가 필수적이다.

 

디스패치는 이 껍데기인 을 버렸다. 디스패치가 말하는 탐사보도에서 나는 한 차례도 디스패치의 보도 텍스트를 통해 깊이 있는 분석적 태도를 느낀 적은 없었다. 대부분 말초적이었다.

 

하지만 황색저널리즘, 선정적 보도라는 일부의 비난에도 여전히 그들이 주식시장에서 JYP의 주가를 하락시키는 등의 영향력 있는 보도를 할 수 있는 것은 독자들의 눈을 믿게 만드는 확실한 사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L, S양이 아닌 이민호와 수지라고 폭로하기 위해서는 사실을 믿게 할 수 있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디스패치 보도에는 이 증거가 언제나 인증샷의 형태로 나타난다.

 

팩트에 인증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정확했다. 수차례 열애설 기사에서 당사자들이 그 인증샷을 보고 열애가 아니라고 부인하거나 디스패치를 오보로 고소한다는 말은 김연아 보도건을 제외하고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대신에 자주 접했던 소식은 기사가 나가고 몇 시간 뒤 예쁘게 만나고 있다. 지켜봐 달라는 소속사의 열애인정 보도였다.

 

그들은 대신에 팩트를 취했다. 팩트가 표현하는 강력하고 선명한 점 하나에 기사의 모든 것을 집중시켰다. 인증샷이 중요한 매개체가 됐다. 대부분 기존 연예기사에서 사진은 텍스트의 보조자 역할이나 분량 채우기에 머물렀다. 사진이 없어도 텍스트만으로 기사의 의미를 알 수 있다. 하지만 디스패치 기사의 대부분은 사진과 텍스트의 중요성이 동급이다. 시각적 기법에 대한 노하우와 원하는 장면을 포착하기 위한 사진기자의 숨겨진 노력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이다.

 

파파라치 그 이상의 파파라치

 

(사진: 디스패치 홈페이지)

 

기자치고 파파라치 기질이 없는 기자는 없다. 그리고 다른 매체의 연예기자들이 바보는 아니다. 그런데 왜 다른 매체 기자들은 디스패치의 단독 기사를 먼저 캐치하지 못했을까.

 

이유는 디스패치가 파파라치 행위 자체를 기사의 완성에 ‘Only One’ 전략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파파라치의 결론은 하나다. 따라다니다 보이고 확인되면 임무는 완료된다. 그런데 이 따라다니며 보이고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끈질긴 인내를 요구한다. 누군가를 따라다니고 미행하고 관찰하는 것은 시간과 장소의 제한이 없다. 보일 때까지 미행해야 한다. 그런데 디스패치는 보일 때까지 미행한다. 프랑스와 영국까지 따라간다.

 

하지만 다른 매체 연예 기자들은 이런 무제한의 미행은 현실적으로 할 수 없다. 수지의 열애설에 대해 정보가 있지만 수지가 출연한 영화와 음악, CF에 대해서도 기사를 써야 하는 기자와 수지의 열애설만을 위해 그녀의 움직임만 365일 따라다니는 기자 가운데 누가 열애설 기사를 먼저 생산할 확률이 높을까.

 

수지가 평생 한 명의 남자와 연애도 하지 않고 집에서 할머니로 늙지 않는 이상, 수지를 평생 따라다니기만 한 기자는 수지 특종을 잡고 싶지 않아도 잡을 수밖에 없다.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당연한 과정만하기 힘들기 때문에 누구나의 당연한 특종은 나오지 않는다.

 

디스패치는 홈페이지에서 수많은 특종이 밤샘과 잠복 그리고 기자들의 열정이 융화돼 만들어졌습니다라고 자랑하고 있다. 충분히 자랑할 만하다. 마스크를 써도 마스크안의 얼굴을 알게하는 창조는 이런 인내에서 나온다.

 

'11일 예고 전략'

 

(사진: 디스패치 홈페이지)

 

비와 김태희’, ‘이승기와 윤아’ ‘이정재와 임세령열애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11일이다. 디스패치가 매년 신년 첫날 신년 기획으로 열애설을 터뜨리는 것은 이제 연례행사가 됐다. 언제부터인가 매해 첫날 아침 국내포털 메인 페이지에는 새해 해맞이 사진 옆에 항상 디스패치의 열애기사가 붙어있다.

 

매우 효과적인 창조적 기법이다. 전설의 강타자 베이스 루스가 타석에 들어서 왼쪽 펜스를 가리키며 왼쪽으로 예고 홈런을 치는 것과 유사하다. 매년 11일은 디스패치의 예고 특종일이다. 어떤 매체에서도 보지 못한 기획력이다. 1년의 단 하루, 그것도 새해의 첫 날 특정 매체에서 매년 유명인의 열애설을 대중에게 노출하는 전략은 희소성과 주목도에서 강력함을 유발한다.

 

이 전략 역시 11일까지 기다릴 수 있는 인내심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기법이다. 자신감도 필수적이다. 특종을 알고 있어도 그 이전에 다른 매체에서는 절대 보도할 수 없을 것이라는 기분 좋은 오만함과 배짱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여기에 11일 신년 기획에 걸맞은 비중을 가지는 유명인의 열애설을 확보하고 있다는 사전 구성이 있어야만 ‘11일 전략은 유효하다.

 

디스패치의 폭로 전문 기사는 하루아침에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디스패치 기자들은 과거 2000년대 중후반 유사한 형태의 보도로 주목을 받던 스포츠서울닷컴 기자들이 주축이 된 그룹이다. 그만큼 10여년에 이르는 시간을 두고 파파라치식 보도에 대한 노하우를 쌓아왔다.

 

(사진: 디스패치 홈페이지)

 

하지만 아쉬움도 있다. 디스패치의 목소리는 듣기 힘들다. 수많은 팩트 자체가 디스패치의 목소리 일 수는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 폭발적인 보도를 생산한 주체의 논평이나 시각, 알권리와 사생활 침해의 논란 등에 대해 블로그가 아닌 기사로써 들을 시기는 됐다.

 

이는 디스패치가 스스로 규정하는 언론이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언론(言論)의 사전적 의미에는 개인의 말과 글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말이나 글로 발표하는 일도 포함됐기 때문이다.

 

디스패치가 홈페이지에서 강조하고 좌우명이라고 밝힌 언론의 자유는 언론을 소유한 사람에게만 보장된다는 말도 디스패치의 성격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 기존 언론의 타성을 깨기 위해 새로운 언론을 만들고, 독자 편향·관심 팩트 위주의 표적 기사를 생산하면서 이 말을 믿는다고 대문짝만하게 내건 것은 모순적이다.

 

저널리스트 A. J. 리블링(1904~1963)한 이 말은 과거 언론계에서는 편집권의 독립이나 언론의 주체적 성격으로서 회자된 유명했던 말이지만 이제는 매우 낡은 권위적인 이론으로 성격이 변했다.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언론의 자유가 오직 언론을 소유한 사람들에게만 허용될 수 있을까.

 

그래서 언론인 켄 닥터가 자신의 저서 <뉴스의 종말(21세기북스)>에서 이제는 언론의 생산수단 소유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며 리블링의 말을 반박한 것은 이유가 있다.

 

적어도 디스패치의 독자를 생각한다면 리블링의 이 60여 년 전의 시대착오적 언어는 디스패치 홈페이지에서 사라져야 한다.

 

By ThinkTan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