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 스미싱 문자사기? 미스터리?]
[문제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한 남자의 호기심]
이 기막히고 부.끄.러.운 황당 에피소드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미리 공지하건데, 결말을 살짝 밝히자면 다소 허무하다. 그래서 혹시나 제목에 끌려 싱크탱커에게 낚이신 분은 이 글을 읽지 않고 지금 휘리릭 나가셔도 좋다.
그래도 끝까지 읽으시겠다면 시작하겠다. 그리고 보답으로 하나의 평범한 교훈도 제시하겠다.
발단은 아래와 같은 한 통의 문자 메시지였다.
(사진 출처 및 권리=<창조의 재료탱크>)
농협) 김XX님 휴대폰 010-000-00XX에서 010-312-00XX로 변경됨을 알려드립니다[FW]
발신번호는 전화번호 053으로 시작하는 대구의 한 농협 지점이었다.
나는 김XX님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단 이 문자 메시지에는 내가 전혀 모르고, 나와는 완전히 관계가 없는 4가지가 있었다. 김모씨, 그의 과거 및 현재 휴대폰 번호, 대구의 어느 농협지점이 그것이었다.
직감적으로 스팸 문자로 알았다. 나의 휴대폰 번호는 010-0000-ABCD이다. 그런데 이 번호와 전혀 무관한 네 가지는 나와의 억지스런 연관을 주장하고 있었다. 가히 4가지는 싸가지 없는 문자였다. 싸가지는 욕이 아니다. 국어사전에 ‘어떤 일이나 사람이 앞으로 잘될 것 같은 낌새나 징조’를 뜻하는 ‘싹수’의 방언으로 적시돼 있다. 이점에서 이 문자는 싹수가 노랗게 보였다.
그리고 2분 뒤 두 번째 문자가 또 왔다.
(사진 출처 및 권리=<창조의 재료탱크>)
김모씨 계좌가 신규로 개설로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려니 했다. 스팸도 두 번은 보내야 스팸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오전부터 또 문자가 왔다.
(사진 출처 및 권리=<창조의 재료탱크>)
2억3천만 원을 김모씨가 대구 농협 A지점에서 빌린 모양이었다. 스팸 치고는 제법 집요했다. 김모씨와 이틀 연속 나를 엮으려 들었다. 하지만 8분 뒤 아래의 문자가 연이어 왔을 때 나는 이 문자가 단순한 스팸이 아니라 스미싱 문자 사기일 수도 있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
(사진 출처 및 권리=<창조의 재료탱크>)
김모씨 계좌로부터 1억9천만 원이 인출. 여기서 포인트는 ‘인출’이었다. 언어 ‘인출’은 인간의 심리를 위축시키는 힘이 있다. 물론 내 통장 계좌로부터 인출됐다는 내용은 아니었다. 나와 무관한 제3자의 통장에서 돈이 인출됐다는 메시지였다. 그런데 뭔가 돈이 빠져나갔다는 그림이 자꾸 좋지 않은 연상 작용을 일으켰다. (싱크탱커도 농협 통장이 있긴 했다.) 그리고 대구의 농협 A지점은 이 내용을 왜 자꾸 나에게 화급하게 알려주는가.
찜찜한 기분 속에 하루가 지났다. 약속이나 한 듯 문자가 또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문자 발신자가 명백하게 ‘농협 콜센터’였기 때문이다. 내용도 아래 사진과 같이 충격적이었다.
(사진 출처 및 권리=<창조의 재료탱크>)
[김모씨님의 타행/타기관 공인인증서 등록 본인 아닐시 즉시 신고] 순간적으로 나는 여기서부터 내가 김모씨가 됐다고 생각했다. 김모씨라는 망할 작자가 나를 도용해 2억3천만 원을 빌리고 1억9천만 원을 인출해가거나, 유사한 스미싱 문자 사기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마음이 전신을 휘감았다. 이 문자는 연이어 2번 긴급하게 전송됐다.
이쯤 되면 사태를 파악해야 했다. 요즘에는 농협 콜센터 번호(1544-2100)로도 사기를 친다고 들었다. 그래서 의심을 한바구니 가득 품은 채 우선 전화를 걸었다.
시작은 그럴 듯 했다. 통화음은 농협을 소개하고 상담원을 연결해준다고 했다. (짜식들 흉내 내느라 훌륭하다!) 상담원이 받았다. 혹시나 했는데 톤이 이상하다. 목소리가 개그콘서트 ‘황해’에서 보이스피싱 연기를 했던 개그우먼 이수지와 비슷하고 심지어 연변 말투까지 느껴졌다. 이 무슨 우연의 일치인가. 당황하셨어요? 내가 정말로 당황됐다.
사기의 확인 차원에서 일단 지금까지의 이상한 점들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랬더니 다짜고짜 그 문제의 이수지 비슷한 상담원은 본인 확인을 위해 나의 농협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비밀번호? 농협 콜센터에서 비밀번호를 요구한다? Why??
(사진 출처 및 권리= KBS)
이 시점에서 나는 이수지 비슷한 농협 콜센터 상담원이 정말로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의 행동대원이라고 확신을 가졌다. 다시 전화하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황급히 끊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의 무지였다. 농협 콜센터는 원래 본인 확인을 위해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를 핸드폰 키패드로 요구하고 이런 절차를 통해 누른 번호는 상담원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이후 알게 됐다.
마음을 다소 진정시키고 재차 농협 콜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다른 상담원이 연결됐다. 이 상담원은 목소리가 아까와는 다르게 차분했다. 뭔가 이야기를 자세히 듣겠다는 마음이 전달됐다. 나의 전후 사정을 들은 뒤 그녀는 확인해보고 전화로 알려주겠다고 했다.
5분 뒤 전화가 걸려왔다. 결론은 자신도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과거에 혹시 김모씨가 썼던 010-312-00XX 번호를 착신으로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런 일은 없었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이 상담원은 이 문제는 농협 콜센터에서 알 수 없기 때문에 최초 문자 발신지였던 대구 농협의 A지점과 확인을 하고 대구 A지점으로부터 직접 내게 전화가 가게 해준다고 했다.
몇 분 뒤 전화가 왔다. 30대 초반 목소리로 보이는 대구 농협 A지점의 한 남자 직원이었다. 목소리는 매우 활기찼다. 목소리만으로 뭔지 모르게 신뢰가 갔다. 그의 해명을 듣고 이 모든 상황은 스팸이나 보이스피싱이 아닌 ‘사실’임을 알게 됐다.
실제로 김모씨가 대구 A지점에서 문자와 같은 은행 업무를 했고, 자신이 문자 전송 등 관련 일 처리를 직접 했다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남자 직원은 김모씨의 전화번호 010-312-00TX를 잘못 눌러 010-312-00XX로 잘못 전송됐다는 것을 확인해줬다. 그래서 앞으로 내 번호로는 김모씨의 은행 업무 처리 내용이 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완벽하게 모든 것이 풀리지는 않았다. 010-312-00XX로 보낸 내용이 왜 내 핸드폰 번호 010-0000-ABCD로 자꾸 포워딩 되느냐는 점이었다. 그 남자 직원은 내게 혹시 투넘버를 쓰냐고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답했다.
다시 알아보고 전화를 주겠다고 했다. 자기 스스로도 매우 이 사태가 궁금하다고 했다. 이 남자 직원은 어떤 경로를 통해 무언가를 확인하고 10분 뒤 재차 전화를 줬다. 농협의 모든 문자 전송 기록을 알아보니 최근 2일간 내 휴대폰 번호로 농협이 문자를 발송한 기록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 이것은 도대체 뭔가. 농협이 010-312-00XX으로 보낸 문자가 왜 자꾸 내 번호 010-0000-ABCD로 오는 것인가. 가히 풀리지 않는 핸드폰 사건 미스터리였다. 남자 직원은 혹시 통신사의 문제나 착오가 아닐까라는 의문을 내게 던지며 그렇게 통화는 끝났다.
그런데 5분 뒤 이 남자 직원이 전화를 또 걸었다. 목소리는 다소 흥분해있었다.
“정말 이상하네요! 저는 지금 010-312-00XX으로 혹시나 해서 전화를 걸었거든요. 그런데 010-0000-ABCD 번호로 받으시네요? 이것은 분명히 통신사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
결정타였다. 두 번호가 연결돼 있다는 강력한 증거였다. 즉시 통신사 SK 텔레콤에 전화를 걸었다.
아뿔싸!!!
확인결과 이 모든 것은 나의 무지와 경솔함, 쓸데없는 의심에서 비롯된 코미디였다.
싱크탱커는 몇 개월 전 핸드폰을 <갤럭시노트5>로 바꾸면서 <갤럭시 기어S>도 같이 신청해서 쓰고 있었다. 그때 기어S에 부여된 번호가 010-312-00XX이었던 사실을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번호로 대구 농협 남자 직원이 문자를 잘못 보냈고, 이 내용은 기어S와 연동된 내 핸드폰 번호 010-0000-ABCD로 포워딩된 것이 이 미스터리의 최종 그림이었다.
이제 왜 싱크탱커가 글의 시작에서 이 에피소드에 결말이 허무하고 부.끄.러.운이라는 강조 수식어를 넣었는지 알게 됐을 것이다. 그렇다. 참으로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기기의 번호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첫 번째, 공연한 사기 의심으로 혼자 환상의 나래를 펼쳤다는 것이 두 번째였다.
하지만 나는 긍정적이고 싶었다. 하나의 교훈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는 농협 콜센터, SK 텔레콤 직원의 친절한 상담도 물론 고마웠지만, 이 가운데 대구 농협 A지점의 활기찬 남자 직원이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모든 문제 해결은 이 남자가 취한 아주 작은 행동과 호기심에서 비롯됐다. 생각해보자. 이 남자, 업무로 바쁜 남자였을 것이다. 사실 관계를 설명하고 문제의 근본 원인이 대구 농협 A지점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게 확인시켜줬다. 이후 추가적인 행동은 사실 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그냥 나와 전혀 무관한 사람이 어쩌다 우연으로 생긴 사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치부하고 넘기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이 남자 직원은 나 이상으로 이 문제를 빛나는 호기심으로 접근했다. 도대체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는지 스스로 너무나 궁금하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그럴 이유나 의무가 전혀 없음에도 문제의 번호 010-312-00XX로 직접 전화를 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사소한 이 행동 하나 때문에 문제는 최종적으로 풀렸다.
싱크탱커 역시 호기심을 가졌다. 하지만 엄밀하게 나의 호기심은 의구심이었다. 문제 자체의 의심으로만 주변을 맴돌았지 해결에 직접적으로 다가서지는 못했다. 반면 남자 직원은 문제의 핵심을 호기심 어린 행동으로 뚫어냈다.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불과 전화 한 통 해보는 것이었다. 이 간단한 것을 결과를 보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간단한 것을 직접 실행하는 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바꾸는 창의성이나 혁신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문득 사회과학 서적의 명저 말콤 글래드웰의 <티핑포인트>가 떠올랐다. 글래드웰은 이 책에서 세상의 혁신을 이끄는 3종류의 사람을 거론한다. 이 가운데 소수의 법칙을 이끄는 ‘메이븐’은 ‘능동적 정보수집가’로 대표된다.
책에 나온 마크 앨퍼트처럼 능동적 정보수집가는 자기 문제를 해결한 경험으로 타인의 문제를 풀어주는 동시에 남을 돕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누구나 하지 않는 깡통 내용물의 수량을 저울로 실제로 확인하거나 전기부속품의 개수를 설계도와 직접 대조하는 행동을 전혀 번거로워 하지 않고 오히려 즐긴다.
능동적 정보수집가는 호기심을 바탕으로 한다. 인간은 궁금하지 않으면 스스로 나서서 정보를 취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남자의 목소리가 통화 시작부터 활기찬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은 언제나 활력이 넘친다. 뇌가 죽어있지 않은 것이다.
싱크탱커는 이날 살아있는 ‘메이븐’을 만났다. 물론 얼굴은 직접 보지 못했다. 그러나 얼굴 안본 것이 무슨 대수일까. 때론 목소리만이 주는 청각이 시각을 압도할 수 있다. 나는 충분히 음성만으로도 이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최종적으로 이 남자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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