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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기법

어린이날 떠올리는 어린이의 창의성

 

 

 

[똥 중에 가장 불행한 똥은 무엇인가]

[월트 디즈니와 미키 마우스의 탄생 이유]

 

불행한 일이 거듭 겹침이란 뜻의 사자성어는?

 

(   )(   )

 

괄호 안에 들어갈 글자는 쉽다. 두 글자 모두 자가 들어간다. 모두가 너무 쉽게 설상가상(雪上加霜)’을 완성할 수 있다.

 

하지만 어린이는 다르다. 어린이의 답은 아래의 사진과 같았다.

 

(사진: 창조의 재료탱크)

  

() () 였다!!

 

이 답안은 오래전 개그다. 수년전 인터넷에서 유명했던 한 어린이의 실제 학교 답안지였다. 광고인 박웅현은 2009년 자신의 저서 <인문학으로 광고하다>에 이 어린이의 모범 답안을 수록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화제를 모았다.

 

문득 어린이날 이 설사가또가 또 생각났다. 큰 웃음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엄청난 발견이기도 했다. 어떠한 언어학자도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때로는 매우 유치해 보이는 언어나 착상에서도 진정한 창조적 사고를 발견할 수도 있다. 수많은 학자들이 창의성을 배양하기 위해 어린 시절의 호기심과 순수함을 유지하고, 어린이들에게 창의성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눈 위에 또 서리가 내린다는 뜻이 설상가상이다. 그런데 어린이는 설사 위에 또 설사를 싸는 행위를 불행의 겹침으로 봤다. 실제로 그렇다. 설사 했는데 또 설사가 이어지면 '변기 위의 불행'이다.

 

어떤 의미에선 설사를 머릿속에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한 차원 높은 언어의 비유였다. 똥 중에서 가장 좋지 않은 것이 설사. 이미 설사라는 단어에 똥의 불행을 입혔다. 그런데 설사가 또라면 복통이 이어졌다는 뜻이다. 복통은 아픔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불행이다.

 

또 다른 질문 부모님은 우리를 왜 사랑하실까요?”의 답변도 마찬가지다.

 

이 질문을 받은 성인들은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당연한 질문에 당연하게 대답해야 되는데 막상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지 힘들다. “부모님의 자녀 사랑은 당연하니까라고 말하면 뭔가 당연해서 정답이 아닌 것 같다.

 

그때 이 어린이는 그러게 말입니다라고 짧게 일갈한다. 세상을 통찰하는 철학자가 따로 없다. 내공 100단의 도사나 다름없다. 어린이의 시각이다.

 

창의적 사고와 권위적 사고는 양립할 수 없다. 어린이의 사고는 탈권위적이다. 창의적 사고에 유리한 위치에 있다. 그래서 빛이 나며 새롭다. 만약 어떤 저명한 언어학자나 국문학과 교수가 설상가상을 설사가또라고 학계나 공개적인 장소에서 발표했다면 그는 질 떨어지는 학자로 매장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이였기 때문에 그는 매장당하기는 커녕 5여년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생각의 푸르름이 살아 숨 쉰다. 감히 예상컨대, 이 어린이는 분명히 미래의 뛰어난 크리에이터가 될 것이다. 이미 그렇게 성장해 있을 지도 모른다.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봤다. 중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이 했던 이야기가 매우 기억에 남았다.

 

콘크리트 벽 속에서는 천재나 뛰어난 작가가 절대로 탄생할 수 없다.”

 

미당 서정주의 시를 수업하다가 뜬금없이 선생님이 요즘의 교육 환경을 개탄하며 했던 말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자연을 벗 삼아 뛰어 노는 것이 관찰력과 상상력, 창의력에 도움이 되고 이런 경험들이 쌓여 성인이 됐을 때 미당 서정주 같은 창의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요지였다. 반면, 아파트 벽에 갇혀 TV 등 일방적인 정보에만 노출된 어린이는 절대로 창의성을 키울 수 없다고 덧붙였다.

 

 

서정주 말고 외국에도 자연을 벗 삼아 크리에이터로 성장한 유명한 어린이가 있었다. 월트 디즈니였다. 그는 유년기에 많은 시간을 미주리 시골 농장에서 보내며, 평생 동물을 관찰하고 그리기를 즐겼다. 동물의 움직임과 특징을 들여다보는 것은 그에게 큰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

 

디즈니는 성인이 되고 캔자시스티에 머물 때 책상 주변을 돌아다니는 귀여운 생쥐를 어린 시절처럼 비슷하게 자세히 관찰하고 스케치했다. 이 과정에서 역사적인 캐릭터 미키 마우스의 전신 모티머 마우스가 탄생했다. 만약 디즈니가 콘크리트 벽속에 매몰된 어린이였다면 세계를 바꾼 수많은 걸작 애니메이션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이 이야기 했던 당시에는 서울에 아파트 등 부동산 투기가 붐을 일으키던 시기였다. 선생님은 이런 환경을 교육 현실과 서정주를 연결해 학생들에게 품격 있는 상징어 콘크리트 벽으로 전달했다.

 

내게 선생님의 콘크리트 벽은 스티커 메시지였다. 언어가 느낌상 매우 좋지 않게 들렸다. 뭔가 자유로운 사고를 막는 나쁜 벽으로 인식됐다.

 

그래서 어린 시절 서울 시내 콘크리트 벽안에서 살았음에도, 묘하게 자연이 어우러지며 살아있었던 환경에서 성장한 것은 내게 조금은 행운이었다.

 

아파트를 둘러싸고 있던 산에서 나는 친구들과 이상한 짓을 했던 것이 떠오른다. 메뚜기를 잡아 메뚜기 올림픽을 열었다. 특히 메뚜기의 역도 종목을 생각하다가 메뚜기의 발이 끈적거리는 것을 생각해 풀잎을 몇 개 집는가를 측정해 가장 많이 들어 올린 메뚜기에게 금메달을 안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터무니없는 행동이었다. 메뚜기 올림픽이라니...메뚜기의 역도라니...이게 가당키나 한 이야기인가...그런데 가끔은 어린 시절의 이런 철부지 기억들이 매우 새롭게 느껴진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됐다. 늘 그렇지만 인식과 실행은 언제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다. 콘크리트 벽을 인식은 하고 있지만 자유롭게 벽에서 벗어나긴 쉽지 않다.

 

어린이날 다시 보게 된 설사가또에서 조금은 그 벽이 허물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린이는 그래서 위대하다. 어린이날 돌아다니는 어린이들에게 잘 해줘야 한다. 그들은 걸어 다니는 크리에이터들이다. 어린이들을 콘트리트 벽안에 가둬놓아선 안된다.

 

By ThinkTan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