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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에이터

'크리에이터' 버나드 쇼를 주목하는 이유

 

(사진: <창조의 재료탱크>, ThinkTaker)

 

[버나드 쇼...영원한 반항아, 그 개혁의 의지]

[버나드 쇼가 남긴 묘비명의 숨겨진 이면]

 

버나드 쇼(1856~1950)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일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묘비명이다. 묘비명이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지이다. 원문은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이다. 그래서 의미가 과장된 오역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쇼의 특성을 잘 드러내도록 오히려 의역이 잘됐다고 본다. 아무튼 그는 어떻게 죽음에 이르는 순간에도 이런 창의성 넘치는 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을까.

 

두 번째는 미녀의 유혹을 뿌리친 일화다. 미모의 무용가인 이사도라 던컨은 쇼에게 당신의 머리와 나의 미모가 합쳐지면 아주 훌륭한 아이가 탄생할 것이라며 유혹했다. 그러나 쇼는 당신의 나쁜 머리와 나의 못생긴 외모를 가진 아이가 탄생할 수도 있다며 거절했다. 원문은 “But Suppose the Child Inherited My Beauty and Your Brains?”이다. 생각의 전복, 역발상을 드러낸 창조적 전환이다.

 

이 두 가지 일화는 대중들에게 상당히 많이 알려진 이야기다. 각종 미디어에서 인용도 무수히 했다. 이밖에도 쇼는 능란한 화술과 독설, 눈부신 산문체, 논쟁적인 언변, 진지한 익살, 재치 있는 풍자가 돋보인 영국의 극작가로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 내게 쇼의 두 가지 일화와 그에 대한 이 같은 수식어는 성인이 된 싱크탱커에게도 매우 강렬하게 남아있었다. 쇼를 좀 더 알고 싶었다. 이 할아버지, 전형적인 크리에이터 같았다. 그래서 예전에 쇼에 대한 자료를 찾기 위해 서점에 갔는데 거의 없었다. 있어도 대부분 지나치게 문학비평에 초점이 맞추어진 전문적 내용이라 거리가 멀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문고판이 모여 있는 서가에서 이 책 <버나드 쇼..영원한 반항아, 그 개혁의 의지>(정경숙 저, 건국대학교 출판부)를 발견했다. 책은 매우 얇았다. 150페이지 밖에 안 된다. 마음먹고 읽으면 30분 안에 독파가 가능한 부담 없는 분량이다. 값도 당시에 단돈 4,000원이었다. (요즘 짜장면도 4000원은 넘는다!)

 

(사진: <창조의 재료탱크>, ThinkTaker)

 

하지만 이 책은 4,000원의 가격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쇼의 일생에 대한 핵심적 내용을 기술하고 있었다. 싱크탱커가 창조적 버나드 쇼로서 느낄 수 있는 많은 내용들이 있었다. 150페이지 끝까지 다 볼 필요도 없다. 70페이지까지만 읽어도 큰 줄기는 다 있다. 그 정도로 좋은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예상한 대로 쇼는 전형적인 크리에이터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장 환경부터 그는 환경의 어려움을 딛고 일어선 의지의 소년이었다. 쇼의 아버지 조지 카 쇼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무능력한 가장이었다.

 

하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를 아들에게 자주 들려줄 정도로 유머를 즐길 줄 아는 아버지였다. 쇼의 유머감각은 이때부터 주입됐지만, ‘이렇게 밝은 아버지이렇게 무능력한 아버지사이의 괴리는 자본주의의 사회 시스템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독설가의 자질도 동시에 심어주었다.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는 점도 특이점이다. 쇼는 평생을 독학했다. 방대한 독서를 통해 사상과 음악과 극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립해 위대한 비평가가 됐다. 그야말로 독고다이로 크리에이터가 된 셈이다.

 

극작가인 쇼가 음악, 특히 오페라에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놀랍다. 그러나 음악 덕분에 쇼가 문학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은 더욱 놀랍고 주목할 점이다. 이미 거의 100년 전부터 쇼가 통섭’, 장르의 크로스오버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음악에 대한 지식에 힘입어 그는 소설가로서 보다는 비평가로 성공하기 시작했고, 비평가에서 다시 극작가로 변신했다.

 

무솔리니, 히틀러, 스탈린을 위대한 지도자로 찬양하고 미국인의 90%는 멍청이들이다라는 반미주의자로 활동하다, 영국을 방문한 미국인 헬렌 켈러의 장애를 조롱한 것처럼 전해져 엄청난 역풍을 맞은 것은 옥에 티였다. 인터넷과 SNS가 있는 요즘 시대였다면 오랜 기간 방송 출연 정지를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멋지게 재기했다. 쇼는 1925년 거부하던 노벨문학상을 마지못해 수상했는데, 최종적으로 노벨문학상의 상금은 받기를 거부했다. 대신 나는 이미 독자들 덕분에 필요 이상의 돈을 벌었고 그동안 누린 명성 역시 나의 정신 건강에 최상의 보답을 했기 때문에 충분하다. 상금은 필요 없다며 끝까지 멋있는 척했다. 쇼가 거부한 상금은 결국 앵글로 스웨덴 문학 협회의 기금으로 적립되었다. 마하트마 간디 역시 쇼를 가리켜 순수한 영혼을 가진 영원한 젊은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싱크탱커가 쇼를 크리에이터라 규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의 창조적 진화론때문이다. 쇼의 창조적 진화론은 다윈의 진화론과는 다르다. 이에 대해 저자 정경숙은 쇼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지력을 높이 평가했다. 인간이 지닌 의지의 힘을 강조한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 기린이 높은 가지의 열매를 따먹기 위해 점차 긴 목을 갖게 된 것은 목이 길어지도록 노력한 의지때문이며, 이것이 존재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존재의 근원은 창조의 근원과 동의어라고 나는 판단한다. 쇼는 인간의 진화는 창조의 힘 때문이라는 <창조의 재료탱크>가 너무나 좋아하는 말을 애석하게도 이미 1세기 전에 싱크탱커보다 먼저 써먹었다! 나는 이런 쇼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책에서도 마침 창조적 힘을 가진 인간은 스스로 진보할 수 있는 존재이다라며 고맙게도 뒷받침을 해주었다.

 

쇼는 창조적 진화론을 입으로만 떠들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실증적으로 크리에이터의 삶을 보여줬다. 그는 무려 94세까지 장수했다. 대부분의 크리에이터들은 인생의 특정시기에 창조적 역량을 보여준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또 다른 크리에이터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더 이상 자신이 건강악화 등으로 창조적 언어를 만들 수 없음에 괴로워하다 자살했다는 설이 설득력을 갖는다. 하지만 쇼는 달랐다. 94세까지 건강하게 살며 평생 크리에이터였다.

 

노벨문학상은 69세에 받았다. 죽기 1년 전인 194993세의 나이에 <셰익스피어 대 쇼>를 발표했으며, 사망한 해인 1950년에도 <그녀가 할 수 없었던 이유>를 마지막 작품으로 남길 정도로 끈질긴 창조자였다.

 

쇼가 남긴 묘비명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지는 일반적으로 꼭 해야 할 시기에 머뭇거리다 할 일을 하지 못하면 죽어서도 후회하게 된다는 경고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쇼는 절대로 우물쭈물한 사람이 아니었다. 평생의 크리에이터였다. 그랬음에도 반대로 자신이 우물쭈물했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싱크탱커는 쇼의 묘비명은 역설적 묘비명이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묘비를 통해 사람들에게 최후의 독설을 날렸다고 판단한다.

 

그는 끝까지 노력한 인간이었다. 죽음으로 인해 더 이상 95세부터는 '크리에이팅' 할 수 없음을 묘비명으로 탄식했다. 쇼는 나는 최선을 다하지도 않고 자기만족에 빠지는 사람들을 경멸한다는 말을 남겼다.

 

가끔씩 돌아본다. 나는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조지 버나드 쇼...이 할아버지에게 고개가 숙여진다.

 

By ThinkTan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