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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에이터

앤드류 베이어, 경마 분석의 크리에이터

 

시작은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한 권의 책이었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를 알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책의 제목은 <Picking Winners(우승마를 찾아라)>, 저자는 하버드대 출신의

워싱턴포스트 경마평론가 앤드류 베이어였다.

 

책은 호기심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책에는 무수한 숫자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진중했다.

경마를 매우 솔직한 마음으로 대하며, 학문적으로 또 수학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는 진정한 크리에이터였다. 이 책의 초판이 1975년이다.

그리고 국내에 소개된 것이 1994년이다. 미국 경마의 인프라나 역사를 떠나

지금으로부터 무려 40년 전에 이런 분석 툴을 만들었다는 것이 경이롭다.

그의 이론은 현재에도 경마 예상과 핸디캐핑에 중요한 길잡이로 쓰인다.

 

베이어는 이전에 전혀 보지 못한 경마의 분석툴을 제시하고 있었다.

스피드 인덱스(Speed Index :스피드지수)’였다.

 

 

스피드 인덱스는 말의 절대능력을 수치화한 것이다. 가령 1,000m1분에

뛴 말과 1,700m151초에 뛴 말은 어떤 말이 강할까. 스피드 인덱스는 각각 다른 경주거리의

평균기록을 기준점으로 하고 시간에 따라 지수를 가감해 말의 능력을 데이터화한다.

 

즉 어떤 경마장의 1,800m 평균기록이 1508이라면 이 기록을 기준 수치인 80으로 잡고

150682, 151초는 78이 되는 식이다. 스피드 인덱스는 거리와 주로의 속도에 따라 조금씩 수치의 폭이 달라진다. 베이어는 스피드 인덱스의 포인트로 직전1경주와 직전2경주의 데이터가 높은 말, 기복이 심하지 않은 말을 주목하라고 했다.

 

경마는 물론 기록경기가 아닌 착순경기다. 선행마의 페이스와 주로의 빠르기에 따라 기록은

1~2초까지 차이가 날 수 있다. 2초면 11~12마신이다. 그렇다면 기록을 기준으로 산출된

이런 불완전 해보이는 스피드 인덱스가 한국경마에 적용될 수 있을까.

 

이 책을 다 읽고 한 가지 확신은 있었다. 경마가 기록경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잘 뛰는 말의 기록이 못 뛰는 말의 기록보다는 좋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몇 차례 친구와 토론 끝에 시행착오를 겪다가 드디어 그날이 왔다.

1998년 제2회 탐라배 대상경주 였다.

 

인기 1위는 한국경마의 전설 박태종 기수가 기승한 골드카드였다.

그러나 스피드 인덱스가 그다지 압도적으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부담중량도 60kg으로 무너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싱크탱커가 주목한 말은

인기 2위인 공로자(우창구 기수)와 인기 3위인 해동제일(김효섭 기수)이었다.

 

                                                                 (사진: 한국마사회/ 공로자(좌)와 해동제일)

 

당시의 스피드 인덱스 자료가 사라져 소개할 수 없는 것이 아쉽지만,

공로자와 해동제일은 5마리의 능력이 접전으로 평가된 경기에서 유독 스피드 인덱스가 두드러졌다. 믿고 가기로 했다. 친구와 2,500원씩 합쳐서 5000원을

10번 공로자-7번 해동제일 복승식 단.... 구매했다!

 

배당판을 보니 11.2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터무니없는 베팅이었다...)

검증이 아직 안된 스피드 인덱스에 홀려 보조베팅도 없이 이런 높은 배당에

무모할 정도의 자신감으로 단방 베팅을 한 것이다.

 

그리고 텅!

 

발주신호와 함께 게이트가 열렸다.

 

결과는 영상과 같았다. 이미 4코너를 돌때부터 친구와 나는 승리를 확신했다.

다른 말은 없었다. 오직 두 마리만 후미권을 멀찌감치 밀어내고 직선 주로를 질주했다.

공로자와 해동제일이 접전을 벌이며 나란히 들어왔다! 골드카드를 5마신 차로 따돌리며

여유있게 결승선을 통과한 것이다. 우창구와 김효섭이 입상하고 말위에서 나란히 손을 잡는

모습에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이 몰려왔다.

5,000원이 2분여만에 50,000원으로 변해있었다. 우리는 귀가길에 참으로 소박하게 짜장면을 사먹었다.

 

그리고 나는 스피드 인덱스 추종자가 됐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흐르고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답은 아니구나...’

 

경마는 복잡하고 어려웠다. 왜 스피드 인덱스가 낮은 말이 높은 말을 쉽게 이기는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한 이유가 수 만 가지였다. 베이어의 말이 떠올랐다. 단순히 스피드 인덱스가 높다는 이유로 그 말에 베팅한다면 베팅한 돈의 20~30%도 환수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자세하게 한국경마의 메커니즘과 여러 가지 경마의 묘미를 한꺼번에 거론하지는 않겠다.

차차 기록할 시간이 있을 것이다. 아무튼 스피드 인덱스는 경주로 오선지에 기쁨과 실망을 번갈아 변주했다. 복승식 356배의 배당을 적중하는 열쇠가 되기도, 단승식 1.1배가 무너지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2007년 그랑프리는 스피드 인덱스를 이용해 밸리브리가 우승할 것이라는 확신이 왔다. 결과도 우승이었다. (표에 스피드 인덱스가 높아 보이는 포킷풀오브머니는 단거리 지수가 많아 다소 과대평가된 데이터다.)

 

 

 

 

이제 스피드 인덱스가  경마 예상의 절대적인 분석툴은 아님을 안다.

하지만 존재의 가치는 충분하다. 특히 혼전경주나 능력이 비슷한 두 마리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 때 위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경마에서는 기록을 반쪽 자리의 진실이라고 폄하해도, 그것이 50%라도 진실을 담고 있다면 기록의 의미를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베팅에 있어서 1%의 진실이 어디인가. 베팅의 진실은 땅 파도 안 나온다.

 

현재 한국마사회에서도 스피드 인덱스를 공개하고 있다.

이 데이터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취사선택해서 보면 가끔씩 결정적인 실마리를 흘릴 때도 있다.

 

경마는 시작 습관이 매우 중요하다. 지난번 글에 ('겨자맛 아이스크림' 경마를 먹는 2가지 방법)서 밝혔듯이 경마를 꿀을 만드는 시각으로 접근하지 않고 독을 만드는 악습으로 대하면 경마가 즐거움 보다는 오직 돈을 만드는 편협한 도박 기계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 책을 만난 것이 행운인 이유는 경마의 시작을 뭔가 아카데믹(ACADEMIC )하게 접근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유 있는 분석과 그것을 통해 이유 있는 마권 구매로 이어지는 루틴을 만들었다는 것이 가장 컸다.

 

 

이글을 쓰면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베이어의 발자취를 찾아봤다.

그는 여전했다. 데이터를 산출하고 영상을 분석하고 트립(경주전개)을 바라보고 있었다.

 

베이어가 분석을 하는 모습을 보자. 40년 장인의 자태가 느껴진다.

 

 

참으로 묘한 결합이지만 베이어의 모습이 최근에 싱크탱커에게 영감을 주고 있는

이어령이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장면 (다시 빛나는 수필, 이어령 <삶의 광택>)과 오버랩이 됐다.

 

크리에이터들은 뒷모습마저 흡사한 것인가.

 

By ThinkTanker (creationthinktank.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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