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국가문화유산포털)
문학의 상투적 표현으로 자주 등장하는 그 편지가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찢어버리는 밤에 쓴 연애편지’
자신이 예전에 쓴 글을 보면 그렇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어떻게 이런 녹슨 언어들만 골라다가 자랑스럽게 웹에 남겼는지 지워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김정운 박사 같은 뛰어난 지식인조차 자신의 책 <휴테크 성공학>을 책의 내용이 부끄러워 스스로 절판시켰다.
이어령은 다르다. 최근에 싱크탱커가 포스팅한 그의 수필 <삶의 광택>은 25년이 넘은 글인데도 여전히 빛난다. [다시 빛나는 수필, 이어령 <삶의 광택>] <삶의 광택> 뿐만이 아니다. 그의 저서들을 보면 지금보아도 아직도 참신한 시각과 독특한 이론이 물결친다.
결국 다시 그의 책 <유쾌한 창조>를 꺼내들었다. 책의 속지를 보니 2010년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읽었다고 기록해놓았다. 뭔가 필을 받긴 했나보다. 책은 버릴 수 없는 내용과 문장들로 가득차 있었다. 새해 첫 달 TV화면에 잠시 비친 이어령이 창조적 마인드 점화에 좋은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 리메이크의 이유가 됐다.
다시 책을 보니, 머리말부터 예사롭지 않은 관찰력에 고개가 숙여진다.
누가 장고를 이렇게 볼 수 있을까. 학창시절 음악 시간에 잠깐 사진으로 보는 게 전부인 장고... 장고라는 단어는 누군가의 인생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단어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는 이 단순한 장고에서 창조적 기법을 쏟아낸다.
사진의 문장을 보면 오감을 십분 활용한다. 북의 양면이 쇠가죽과 말가죽이기에 동일한 북소리를 내는 일반 북과 달리 다른 소리가 난다는 부분(청각), 자세히 보면 대칭이 아니라 비대칭이라는 부분(시각), 인터뷰이 자신의 생각이 인터뷰어 강창래 작가의 사고와 만났을때 장고소리가 들렸다는 내용에서는 공감각까지 동원한다.
그리고 이것을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로 들을 수 없다는 안타까움을 이야기한 앙드레 말로를
차용하여, 책이 풀어가는 대담의 중요성을 부각한 콜라주 기법까지. 머리말 한 문단에서도 크리에이터는 거장의 내공을 분출했다. 똑같은 2개의 눈과 2개의 귀를 가지고 있는데 왜 우리는 이런 사고를 못할까.
그런데 이 머리말에서 싱크탱커는 이어령 창조기법의 열쇠(수십만 개의 열쇠 중 하나)가 하나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예전부터 생각해왔다. 창조는 결합이다. 절대 단독개념으로는 탄생할 수 없다. A와 B가 있고 A와 B를 합쳐 C를 만들거나 C를 A와 B사이에서 움직이며 상호작용을 만든다. 설사 장고처럼 A라는 단독개념이 있다 하더라도 그 안에 B와 C가 숨어있음을 찾아낸다.
이어령은 이것을 회색 지대(그레이존)로 표현했다. 회색은 사실 긍정의 색깔은 아니다. 회색하면 떠오르는 것이 회색분자, 박쥐 등의 여기저기 붙어 이익을 취하는 나쁜 이미지다. 그런데 이어령은 이 회색을 창조의 색깔로 탈바꿈 시킨다.그리고 회색의 인자 A(검정), B(흰색), C(회색)를 자유자재로 각도를 변화시켜 의미를 더하거나 증폭시킨다. 무수한 D, E, F가 탄생할 수 있다.
싱크탱커는 이를 ‘창조의 3각 기법’으로 명칭하고 싶다.
이어령의 안티팬으로부터 “분하지만 이번에는 감동했다”는 말을 들은
<이마를 짚는 손>이 대표적이다.
‘이마를 짚는 손’, “그것은 타인의 손이면서 이미 타인의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이마를 짚어줄 때, “그 촉감을 통해서만, 선뜻한 타인의 체온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의 열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마를 짚는 손에 이렇게 멋진 의미가 담긴다. A라는 나의 이마를 B라는 타인의 손이 닿으면서
B는 B이면서 A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A와 B가 접촉하는 C라는 촉감을 매개변수로
등장시켰기 때문이다.
‘이어령빠’인 싱크탱커는 안티팬과는 반대로 감동하면서 분했다.
“어찌 이런 생각을 하는 인간이 있나!!”
85페이지에 또 나온다.
나는 동전을 안쪽이나 바깥쪽이 아니라 그것을 세워놓고 보는, 전혀 다른 차원의 관점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보면 동전은 원이 아니라, 표리의 차이가 아닌 선이 됩니다.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최소한 상안적(象眼的) 분류로 문학을 보아야 한다는 거지요.
동전의 안쪽(A), 바깥쪽(B) 그리고 세워놓고 보는 관점(C)으로 타성을 거부한다.
제3장 회색지대에서 3각 기법은 절정을 이룬다. 열 개(A)나 따개(B)가 같이 있는 마개(C)의 역할, 나가다(A)와 들어오다(B)가 합성된 나들이(C), 새(A)와 짐승(B)의 영역을 허무는 역박쥐(C)의 정보기능, 수차례 이야기됐던 디지털(A)과 아날로그(B)의 합체 디지로그(C), 이질성을 나타내는 ‘엇(A)’과 동질성을 나타내는 ‘비슷(B)’을 결합한 ‘엇비슷(C)’ 등 이어령은 누구나 보지만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없는 내용을 쉽게 이야기한다. 심지어 나들이는 “병아리 떼 종종종 봄나들이 갑니다”라는 동요에서 따왔다.
그의 창조적 3각 기법은 다양한 인터뷰를 통해서도 이어진다.
외국어에서는 ‘잘한다’ ‘못한다’라는 두 가지만 있습니다. 잘하는 것 아니면 못하는 것.
그런데 우리는 잘하다(A)와 못하다(B)가 합쳐진 ‘잘못하다(C)’가 있습니다.
또 ‘버린다(A)’ ‘두 다(B)’의 상반되는 뜻을 합친 ‘버려두다(C)’가 있습니다. ‘
여닫이(C)’는 열고(A) 닫아(B)요.
세상에 흑백이란 없습니다. 보다 백색, 보다 검은색이지 무엇을 기준으로 가장 검고 희겠어요?
흰색, 검은색, 양극은 관념적이죠. 현실은 항상 흑백이 얽혀있습니다.
(SK C&C 사보 ‘Create & Challenge’ 2013년 1월호)
비평가, 소설가, 시인, 강연자, 언론인, 멘토, 초대문화부 장관, 88서울올림픽 개·폐회식 기획자,
한·일 월드컵 총괄기획자, 대학 교수, 신앙인, 사상운동가….
다양한 수식어가 있지만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크리에이터로 규정했다. 그리고 88올림픽 때 소년이 굴렁쇠를 굴린 장면을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했던 것이기에 그런 기쁨 때문에 좋아서 했다”고 했다. (조선일보 2013. 12. 30)
이어령이 진정한 크리에이터인 이유인 창조적 생각이 텍스트에 그치지 않고 가시화 할 수 있는 퍼포먼스로 연결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 더욱 88올림픽 굴렁쇠가 돋보였다. 지금도 기억난다. ‘정적’이라는 네이밍에 맞게 조금은 불안한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수십억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넓은 경기장을 조그마한 소년이 굴렁쇠를 굴리며 나타난다. 88올림픽 행사 가운데 유독 이 장면이 떠오르는 이유는 그만큼 집중효과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싱크탱커는 여기서도 그가 창조적 3각 기법이 동원했다고 믿는다.
가장 작은 단위의 소년(A), 가장 큰 단위의 경기장(B)
그리고 손에 든 굴렁쇠(C)다.
만약 소년이 굴렁쇠 없이 그냥 혼자 뛰어나왔다고 상상해보자.
이 얼마나 무미건조한 뜀박질이었을까. 88올림픽 행사를 앞두고 이어령은 매일 새벽 3시까지 돈도 한 푼 안받고 시나리오를 썼다고 했다. 노력 없는 창조는 없다는 평범하지만 무거운 교훈을 다시 얻는다.
그리고 한국이 전세계가 바라보는, 압박이 심했을 국제적인 최초의 행사에서 이어령이라는
크리에이터가 올림픽을 지휘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다행으로, 26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내게 창조적 영감을 주는 그와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 행운이라고 느껴진다.
이 책을 다시 읽기 잘했다.
By ThinkTanker (creationthinktank.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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