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이 표정이었다.
“너 나 홀려봐. 홀려서 널 팔아보라고. 너의 뭘 팔수가 있어?”
미생의 첫 회 질문은 사뭇 도발적이었다. 어렵게 “나의 노력을 팔겠다”고 대답한 장그래에게
오성식 과장은 다시 한 번 희망을 꺾는다.
“안사! 인마! 너의 노력은 변별력이 없다.”
당신은 변별력이 있는 사람인가. 당신은 당신의 무엇을 팔 수 있을 것인가.
장그래에게만 해당되는 질문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오과장의 이 질문을 받고 즉각적으로 답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 미생의 이 첫 질문은 여러 사람의 폐부를 묘하게 파고든다.
이 질문에 역공을 해야겠다. 그렇다면 미생은 “무엇을 시청자에게 팔 것인가.”
공격실패. 팔렸다. 심하게 많이 팔려 신드롬이 됐다.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새롭다는 것은 무언가 창조적이었다는 말이다. 어떤 부분이 창조적이었을까.
‘창조의 끝판왕’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창조의 키워드로 7가지를 꼽는다.
마이클 겔브의 저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생각하기(How to think like Leonardo Da Vinci)>를 통해 ‘미생의 7가지 창조 키워드’를 찾아보자.
1.호기심 (Curiosita: An insatiably curious approach to life)
다빈치의 첫 번째 원칙이자 창조의 1순위 요소다. 원작자인 윤태호 작가는 2013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들이 뭘 좋아하지?’ 하는 고민이 항상 있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직장생활을 하루도 해보지 않는 원작자였다는 것이 역으로 “나를 중학생 취급해라.
다 물어야 한다.”는 호기심 발현에 도움이 됐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정도의 호기심은 누구나 있다.
관건은 호기심의 실행력이다. 탐사보도 기자에 필적하는 취재력이 뒷받침이 됐다. 한 컷을 위해 요르단을 답사하고, 종합상사맨들과 새벽까지 함께하며 치열하게 스토리를 녹취하고 메모했다.
운송장에 대해 더 이해하기 위해 ‘운송장 사고’를 검색하고 그 사고가 캐릭터에게 파생되는
모든 의미를 파악했다. 마인드맵까지 일일이 그리면서.
2. 실험 정신 (Dimonstratzione: A commitment to test knowledge through experience)
모든 지식은 이미 밝혀졌다고 믿었던 시대였음에도, 다 빈치는 이미 밝혀진 많은 지식들을 뒤집는
결론을 얻어냈다. 그 밝혀진 지식이 현대 TV드라마에서는 ‘러브라인’이었다.
밀폐된 엘리베이터 안에서 안영이가 장그래에게 넥타이를 매준다고 할 때 역시나 했지만 페이크였다.
안영이와 장백기 사이에 와이셔츠와 구두가 오고갈 때도 역시 속았다. 썸인가. 쌈인가.
30분짜리 일일 드라마에도 슈퍼 아줌마와 동네 이장과의 이상야릇한 러브라인이 나오거늘.
러브라인 없는 실험정신을 보여준 미생이 성공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이 러브라인이 없다고 공중파가 제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더욱 의미가 크다.
틀에 구속된 사람과 틀을 만드는 사람은 창조력 발휘에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3. 감각 (Sensazione: The continual refinement of the senses, especially sight, as the means to clarify experience)
감각은 오감을 무엇을 어떤 방법으로 시청자들을 충족시켰느냐가 핵심이다.
무엇은 '공감'이고 방법론은 ‘디테일’이다. 디테일이 뛰어났다는 찬사가 많았다.
그 디테일이 공감을 주었기에 효과가 컸다. 사진에서 보듯 소름이 끼칠 정도로
칫솔의 솔 하나까지 챙겼다.(시각) 상사에게 엄청 깨지는 소리와 능수능란한 다양한 외국어의
통화(청각), 옥상에서 따뜻하게 어깨를 다독이는 오과장의 따뜻한 손, 꼴뚜기를 골라내는
차가운 손(촉각), 회식에서 마시는 쓰디쓴 술, 휴식시간의 뒷담화 커피(미각),
한번 쯤 들이켰음직한 나프탈렌의 알싸한 냄새가 풍기는 화장실 옆자리의 후각까지.
모든 감각을 귀하게 여기며 그것을 인식하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 다빈치적 기법이 있었다.
공감에 대해서는 윤태호 작가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리얼리티를 미루어 짐작
할 수 있었을 때, 독자들이 이게 우리의 사는 모습이야 라고 느끼면 된다. 저런 일이 가능해?
라는 의문이 있어도 누군가 저런 일 있었는데요, 라고 말하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회사에서 군대도 아닌데 부장이 부하사원 보는 앞에서 과장의 조인트를 깔 수 있을까’
하는 필자가 가졌던 의문은 실제로 조인트를 까거나 맞은 부장이나 과장이 어느 회사에서
있었다면 드라마 자체는 공감으로 전환된다.
4. 불확실성에 대한 포용력(Sfumato: A willingness to embrace ambiguity, paradox and uncertainty)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받아들이는 능력은 다빈치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미생은 불확실성이 전편에 흐른다. 과연 장그래는 정규직이 될 수 있을까라는 중심축은
장그래가 ‘불확실한 계약직’신분인 것에서부터 태생적으로 작용했다. 첫 회부터 이어진 불확실성은
결국 장그래의 정규직 전환 여부가 마지막 회 선차장이 등장하고 무려 59초간 침묵으로 표현된
뛰어난 연출력에서 정점을 보여줬다.
모호함은 실체가 끝까지 드러나지 않은 러브라인 뿐만 아니라, 안영이가 속한 자원2팀 하대리의
연기에서도 잘 나타났다. 안영이를 괴롭히는데 처음 앞장섰던 하대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안영이를 드러내지 않고 감싸주는 듯한 '악역 인 듯 악역 아닌 악역 같은 악역'을 보여준다.
극 초반 장그래의 우군이라 생각됐던 장백기가 극 중반 장그래의 활약에 크게 질투를 느끼는 장면
또한 일시적이지만 강력하게 장백기의 피아식별을 흐릿하게 만든다.
정윤정 작가가 미생 다큐에서 “원작은 갈등의 서사구조가 약하다”고 한 것처럼 미생은
박과장과 성대리 등 몇 명의 밉상 캐릭터를 제외하고는 명확하게 선과 악을 구분하기 힘든 모호함(ambiguity)을 이용해 드라마에 색다른 효과를 입혔다.
5. 예술/과학 (Arte/Scienza: The development of the balance between science and art, logic and imagination)
다섯 번째 원칙은 이성과 감성의 균형 잡힌 조화다. 눈물 짜기 감성 팔이 드라마나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어려운 드라마는 환영받지 못한다. 미생은 직장생활의 철두철미함과 그 안에 숨어있는
인간애를 균형 있게 끌어냈다. 캐릭터가 가진 이성과 감성의 강약배치도 뛰어났다.
일할 때는 직장에서 저돌적인 오차장은 집안에 가면 한없이 약해지는 가장으로 변모한다.
기름기라고는 전혀 없는 조용한 카리스마를 보여준 강대리는 본사에서 교육 온 여직원에게
의외의 눈을 돌린다.
인턴사원의 마지막 관문인 2차 조별 프레젠테이션 시험 주제 ‘서로의 물건 팔기’는
같은 조원을 떨어뜨려야 하는 적이자, 또 동시에 동지라고 생각해야 하는 혼합된 감정 속에서
이성을 발휘해 회사에 자신을 어필해야 한다는 점에서 효과적인 테마였다.
“사무실과 공장도 모두 이로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같은 현장”이라고 대답한 장그래의 말은
균형감각 면에서도 모범답안이었다.
6.육체적 성질 (Corporalita: The cultivation of ambidexterity, fitness, and poise)
창조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육체적 성질을 이해하고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여섯 번째 원칙이다. 다빈치는 자신의 육체적 성질을 창조력에 발휘하기 위해 모든 종류의
운동을 규칙적으로 즐겼고, 건강을 위한 식이요법을 했으며, 몸의 양쪽을 균형 있게
사용하기 위해 양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썼다. 윤태호 작가에게는 스스로 밝힌
‘기본적으로 낮은 자존감’이 ‘관찰력 향상’이라는 윤작가의 육체적 성질이 됐다.
언론과의 인터뷰 내용에 중요한 답이 있다. “나는 가난하고, 피부가 안좋아 열등한 마음이
심했다. 그래서 타인을 보면 더욱 관찰하게 됐다. 어린시절 화상을 입은 아이가 있었는데
얼굴에는 화상이 심했지만 몸은 깨끗했다. 그때 난 ‘저 몸과 바꾼다면 얼굴에 화상이
있어도 좋아’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나는 자존감이 낮은 시절을 오래 살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다른 그룹에 스며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 어떻게 재미있게 필요한
사람이 될까’ 하는 고민을 많이 했다.”
7.연결 관계 (Connessione: A recognition and appreciation for the connectedness of all things and phenomena; "systems thinking)
고양이와 냉장고의 공통점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둘 다 꼬리가 있고, 그 안에 생선을 넣을 수
있으며, 색깔이 다양하고, 수명은 15년 정도라는 공통분모가 나오기도 한다.
미생은 직장생활과 바둑에서 연결 관계를 찾았다.
바둑엔 기보가 있다. 윤태호 작가는 “바둑의 복기는 성공과 실패의 과정을 목격하는 것이다.
자기의 순간순간을 확인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직장도 다르지 않다. 직장인들은 스스로의 일을 돌아보며 때로는 만족하기도, 탓하기도 한다.
미생에 등장하는 바둑의 여러 명언은 직장생활에서 두고두고 쓸 수 있는 손자병법으로 작용했다.
장그래의 독백 ‘상대가 역류를 일으켰을 때 나의 순류를 유지하는 것은 상대의 처지에서 보면
역류가 된다’는 바둑의 십계명 ‘세고취화(勢孤取和)’에서 따왔다.
‘승리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습관을 만들어주고, 패배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준비를 만들어준다’는 이창호 9단의 말은 드라마 안에서 깊은 울림을 전달한다.
Epilogue
바로 이 표정이었다.
“차장님, 저 홀려보세요. 저 홀려서 잡아보세요. 차장님의 무엇을 팔 수 있어요?”
오차장은 마지막 회에서 첫 회의 장그래처럼 그대로 당했다. 그러나 표정은 달랐다.
윤태호 작가는 “살아간다는 것이 미생인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게 역설적으로 미생이다.”라고 했다.
인생은 완생의 부재라는 시각...그러나 드라마 미생은 역설적으로 완생이 됐다.
장그래가 보여준 남과 다른 <창조적인 노력의 양과 질>을 작품 탄생에 기울였기 때문일 것이다.
By ThinkTanker (corepurity@naver.com)
'창조적 기법' 카테고리의 다른 글
K팝스타 눈물 쏟은 이진아의 치명적 말실수 (0) | 2015.01.26 |
---|---|
<전쟁의 탄생>, 잊지 말아야 할 4가지 시선 (0) | 2015.01.14 |
이어령 '창조적 3각 기법'...<유쾌한 창조> (0) | 2015.01.09 |
김정운 <에디톨로지>, '탁월한 용두' 사미 (0) | 2015.01.03 |
'티핑포인트', 스타가 된 비밀 애인 (0) | 2014.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