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및 권리= KBS)
[인(仁)의 마음과 관계의 상호작용]
[하이퍼텍스트와 첫 번째 언어의 중요성]
“오늘 여러분에게 정말 귀중한 선물을 주겠다.”
이어령 선생은 시작부터 호기심을 이끌어냈다.
이 세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이것이 없으면 한국인이 아니며, 심지어 한국 자체가 무너진다는 말 두 자였다.
그것은 ‘사이’였다.
‘사이’는 국어사전에 ‘한곳에서 다른 곳까지, 또는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까지의 거리나 공간’을 뜻하거나 ‘어떤 일에 들이는 시간적인 여유와 겨를’이라고 명시한다.
17일 방송된 ‘이어령의 100년 서재’ 제8회 ‘인의 마음’에서 선생은 ‘사이’를 한자 어질 ‘인(仁)’에 비유하며 다른 사전적 정의로 강의를 열었다. ‘어질 인(仁)’을 풀이해 사람 ‘인(人)’변에 두 ‘이(二)’자가 쓰였다는 분석으로부터 ‘사람 사이’가 첫 번째로 도출됐다.
사실상 여기서부터 게임 오버였다. 선생이 의도적으로 쉬운 언어를 사용해 모두가 예측 가능한 논의의 복선을 깔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다양한 하이퍼텍스트가 나왔다. 대부분을 열거해보겠다.
인간과 인간, 부모사이, 부부사이, 사랑과 이혼, 이어령 선생과 청중 사이에 위치한 이선영 아나운서, 판소리 고수, 정치의 여야 간, 쇼펜하우어와 호저의 거리(서로 상처내지 않고 체온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적정한 거리), 불가근불가원(不可近 不可遠), 프로이트의 독립과 공존의 딜레마,
‘공자초자 정의할 수 없었던 인(仁)의 개념’, 독립(independence), ‘따로, 또 같이’, 서로 헤아릴 줄 아는 마음, 교감, 공감능력, 불인병(무감각증), 상호감응, 상호작용, 거울뉴런, ‘inter’, 인터랙션(interaction), 인터넷, 인터페이스, 인터페이스와 언어, 기계와 나, 새의 비행, 역지사지(易地思之)까지.
(사진 출처 및 권리= KBS)
‘사이’라는 단 하나의 개념은 무려 28개의 하이퍼텍스트로 발전됐다. 전형적인 크리에이터의 기법이었다. ‘사이’라는 말은 우리가 쉽게 쓰지만 쉽게 인식하지 못하는 언어다. 선생은 여기에 특유의 독특한 의미 입히기와 개념 확장을 통해 모두의 고개를 자연스럽게 끄덕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대부분 짐작하듯이 순 우리말 ‘사이’는 한자어 ‘관계(關係)’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다. 우리에게 ‘관계’는 즉시성이 있다. 듣자마자 ‘두 개 이상의 그 무엇’을 뜻함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게 만든다. 다소 뻔 하게 추측되는 언어이다.
반면 ‘사이’는 어떨까.
쉬운 말이지만 뭔가 생소하다. ‘부부사이’가 등장하면 쉽게 알지만 ‘사이’라는 독립적인 말 자체로는 언어 ‘관계’가 암시한 것처럼 즉각적으로 의미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만약 선생이 방송 서두에 “이것이 없으면 모두가 무너진다”며 ‘사이’가 아니라 ‘관계’를 내세웠다고 해보자. 아마도 방송은 호기심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선생은 ‘관계’라는 명시적인 말을 방송 내내 한 번도 사용하지 않다가 방송 종료 5분을 남기고 처음 썼다.
그래서 ‘확장언어’ 하이퍼텍스트는 첫 번째 언어의 착상과 배치가 이렇듯 중요하다. ‘원숭이 똥구멍은 빨갛다’는 첫 번째 언어가 효과적이어야만 두 번째 언어 ‘빨가면 사과’로 쉽게 이어질 수 있다. 세상에서 빨간 것이 어찌 원숭이 똥구멍뿐일까. 불도 있고 피도 있다. 그러나 원숭이 똥구멍이라는 독특한 빨간색에 인간이 가진 시선의 주목도는 더 몰리게 마련이다.
하이퍼텍스트는 필연적으로 ‘관계’를 전제한다. 8회 내용도 관계의 기법을 전달했다. 관계는 <창조의 재료탱크>에서 여러 차례 포스팅한 것처럼 ‘창조의 3각 기법’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A와 B의 구도가 최초로 설정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A와 B라는 두 개의 개념이 다양한 상호작용을 통해 C라는 창조물이 나오는 과정은 이미 수차례 설명했기 때문에 이번 글에서 자세한 언급은 생략하겠다.
한 가지만 다시 예를 들면, 예전에 썼던 글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도 ‘사이’가 나온다.
2015/02/26 - [창조적 기법] - 앨런 튜링 <이미테이션 게임>, '관계'의 창의성 기법
앨런 튜링이 해독해야 했던 암호는 ‘언어사이’의 언어 간 관계의 비밀을 품고 있다. A라는 암호는 B라는 숨은 규칙성과 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다면 B의 규칙성을 알 수 있는 C라는 방법을 매개로 암호A와 규칙성B의 관계를 찾는 것이 해독이다.
(사진 출처 및 권리= KBS)
관계가 파생할 수 있는 창의성의 가능성은 아마도 무한대 일 것이다. 그래서 “사이를 혁명하자, 사이를 개혁하자, 사이를 재발견하자. 모든 너와 나와의 관계, ‘사이’를 새롭게 하고 우리의 미래를 함께 꿈꾸자”가 이번 방송에서 선생이 내린 결론이었다.
마지막으로, 이어령 선생은 방송 후반 눈길을 끄는 개인적 멘트를 했다.
“솔직한 이야기로 나도 괴로울 때가 많은 것이, 이 방송하고 나서 스트레스 받아. 어떻게 하면 모든 시청자들이 내 말을 알아듣게 할까. 제대로 쉽게 하려다보니 말이 길어져. 한마디 하면 될 걸.”
그는 겸손했다. “나 아는 것 많은 사람이니까, 내가 하는 말 잘들 알아들어라”라는 지식인의 오만함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80대 노인이 된 ‘한국의 위대한 석학’이 스스로 몸을 낮춰 어떻게 사람들을 배려할 것인지, 또 어떻게 소통 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마음에 안고 있는 모습은 울림을 전해줬다.
그는 강의 내용을 말로만 전한 것은 아니었다. 타인과의 관계, 너와 나 사이의 교감과 상호작용을 먼저 생각하는, 스스로가 어질 인(仁)의 실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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