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창조의 재료탱크>, ThinkTanker)
[소설 ‘젊은날의 초상’에 기록된 이문열의 명문장]
그의 텍스트를 읽자 평온했던 뇌혈관이 몇 다발은 더 복잡하게 구부러지는 것 같았다.
1979년 이문열에게 오늘의 작가상을 안긴 <사람의 아들>을 통해서였다. 무슨 사람 이름 읽다가 낙오할 뻔 했다! 아하스 페르츠부터 시작해 무와탈리슈 등 액자 구성 안의 종교적 방황을 독자로서 따라가는 것은 그 당시 매우 벅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소설은 매우 뛰어났다. 다루기 힘든 종교와 구원을 소재로 이런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순전한 작가적 역량이었다. 몇 해 전 KBS <TV문학관>으로 방영했던 영상화된 <사람의 아들>도 적극 추천하는 창조물이다. 문학평론가 권영민 교수의 말처럼 그의 소설은 매우 ‘관념론적인 편향’을 띈다.
싱크탱커 생각으로는 이문열 소설은 이야기로서의 재미는 아주 뛰어나지는 않다. 그러나 오히려 가볍지 않은 것이 그의 강점이다. 문장에 흐르는 특유의 진지함과 현학성이 진중하게 글을 따라가게 만든다. 그를 한국의 대표작가로 만든 원동력이다. 인스턴트 글을 대량으로 양산하는 시대에 ‘크리에이터’ 이문열에 필적하는 ‘깊이 있게 무거움을 전달’하는 작가를 찾기는 요즘도 쉽지 않다.
반면 <사람의 아들> 이후 2년 뒤 이문열이 33살에 출간한 <젊은날의 초상>은 상업적으로는 성공했으나 소설로서는 나를 실망시킨 작품이다. 스포츠의 신인왕 2년차 징크스처럼 명작 출간 이후 후유증인지 소설에서 그다지 큰 감명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하구’, ‘우리 기쁜 젊은 날’, ‘그해 겨울’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는 <젊은날의 초상>에는 딱 한 페이지 결코 잊을 수 없는 페이지가 있다. 이 한 페이지 때문에 이 소설은 내게 엄청난 의미가 있다. 아직까지 국내에서 한글로 읽은 그 어떤 텍스트에서도 이 한 페이지의 문장처럼 특정 개념을 멋지게 표현한 글을 본 적이 없다.
그 특정 개념은 ‘각오’, ‘결심’, ‘시작’이다.
주인공 영훈이 19살의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형이 하고 있는 모래 채취 작업을 도와주며 어렵게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마음을 잡고 자신의 일기장을 돌아보며 수록된 문장이다. 이 문장의 표현 기법에는 창의성이 녹아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이문열의 자전적인 목소리가 영훈의 목소리로 투영돼 그의 일기장을 매개체로 오버랩 했다.
누구나 스스로를 돌아볼 때가 있다. 한 해가 바뀌고 명절 연휴가 끝나고 무언가 새롭게 각오를 다질 때, 또 어떤 시작을 앞두고 결심할 때 꺼내 읽는 <젊은날의 초상>의 이 문장은 모두에게 가슴을 지피는 힘과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그 문장 전문을 <창조의 재료탱크>를 찾아주신 분들만 볼 수 있게 아래에 수록했다.
자기에게 끊임없는 성찰(省察)의 눈길을 던지는 것, 자신을 정신적인 무위와 혐오할 만한 둔감 속에 방치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너는 지금 어떠한 일의 와중에 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이며 또 그러한 네가 현재에게 지불해야 할 것은 어떤 것들인가에 대해 항상 눈떠 있어야 한다.
일체가 무의미하다는 것, 혹은 우리 삶의 궁극은 허무일 뿐이라는 성급한 결론들의 비논리성에 유의하라. 근거 없는 니힐리즘은 조악한 감상주의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저급한 쾌락주의, 젊음의 일회성(一回性)에 대한 지나친 강조 따위, 일상적인 삶의 과정을 경멸하도록 가르치거나, 그것을 위한 성의와 노력을 포기하도록 권하는 모든 견해에 반역하라. 그것들은 대개, 피상적 체험이나 주관적인 인식만으로도 사물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지난날의 네 믿음처럼 자기류(自己流)의 사변(思辯)을 학문적으로 진술한 것에 불과한 것이므로.
또는 너는 무엇이건 지나간 것은 모두 가치 있고 아름답게 만드는 기억의 과장을 경계하라. 지난 이 년이 감미로운 방랑으로 되살아나 너를 충동하게 하는 것은 네 삶을 떠돌이의 비참에 맡기는 것과 같다.
값싼 도취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라. 독한 술은 무엇보다도 네 기억력을 급속히 감퇴시키고, 원활한 사고를 방해하며, 의지력과 극기심을 현저하게 저하시킬 것이다. 무지하고 단순한 이웃에 대한 네 정신적인 우월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라. 그 터무니없는 우월감은 너를 천박한 자기만족에 빠뜨리고, 네 성장과 발전에 심각한 장애가 될 것이다.
(사진: <창조의 재료탱크>, Edit By ThinkTanker)
이 문장이 수록된 <젊은날의 초상> 책 겉표지에는 이문열의 이 책에 대한 애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책은 내 젊은 날들이 영원한 그리움과 회한으로 숨 쉬고 있다. 앞으로 내가 문학적으로 이보다 더 완벽한 글을 쓰게 되든, 그리고 또 어떤 평자가 어떻게 평을 하든, 내 가장 큰 애착은 항상 이 책 위에 머무를 것이다.”
하나의 문장은 인간을 움직이는 위력적인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새로운 각오와 시작의 마음을 결심한 일기장 속 영훈의 문장은 이문열에게 앞으로 가야할 작가로서의 ‘어떤 길’을 알려준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6년 뒤인 1987년 이문열은 한국 현대문학의 보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이상 문학상’을 수상한다.
진정 창조적인 삶을 위해서라면 이 문장처럼 자기에게 끊임없는 성찰의 눈길을 던지고 자신을 정신적인 무위와 혐오할 만한 둔감 속에 방치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 필요하다.
By ThinkTanker
|
|
'창조적 기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바도르 달리, <십자가의 성 요한의 그리스도>의 창의성 기법 (0) | 2015.03.03 |
---|---|
앨런 튜링 <이미테이션 게임>, '관계'의 창의성 기법 (10) | 2015.02.26 |
사회가 원하는 정보는 무엇인가...강균성이 보여준 폭발력 (0) | 2015.02.13 |
라디오스타와 강균성, 소찬휘 Tears가 알려준 창의성 아이디어 (0) | 2015.02.12 |
'애매성의 시대', 정보전달 어떻게 할 것인가 (0) | 2015.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