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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기법

서건창 200안타 장면과 관계론적 사고

 

(사진: 넥센 히어로즈)

 

 

[서건창은 어떻게 200번째 안타를 만들어냈나]

 

야구는 관계(關係)의 스포츠다.

 

둘 이상의 사람, 사물, 현상이 서로 상호 연관 되어 있는 것이 관계다.

야구가 관계의 스포츠라는 것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타자와 투수의 싸움이다.

 

이들의 관계는 한 타석에서의 승부부터 시즌 전체, 길게는 은퇴할때까지의 맞대결로 이어지기도 한다. 단일 승부의 모양은 ‘가위바위보게임과 흡사하다. 상대방이 무엇을 내느냐에 따라 나의 주먹이 결정된다. 상대방이 가위를 내면 이기고 거꾸로 보자기를 내면 진다. 타자가 변화구를 생각할 때 투수가 직구를 던지거나, 타자가 몸쪽을 예상할 때 투수가 바깥쪽을 투구하면 타자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이 싸움을 가장 잘한 타자는 서건창(25ㆍ넥센)이었다. 그는 한국프로야구 최초로 200안타의 신기원을 이뤘다. 관계론적 사고에 능한 타자들은 좋은 선수가 될 수밖에 없다.

 

관계론적 사고는 국가대표 크리에이터이어령 선생이 자신의 저서 <생각>에서 주장한 개념이다. 크리에이터를 지향하는 이 블로그 <창조의 재료탱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는 거북선을 예를 들어 설명한다. “거북선을 실체론적 입장(하나의 단일 개념)에서 보지 않고 관계론으로 생각의 틀을 바꾸면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난다.”

 

그는 가려져있는 부분을 연이어 날카롭게 지적한다. 실제로 한국인 모두가 거북선은 배웠지만, 거북선과 싸운 일본배에 대해서는 가르치거나 배운 적이 거의 없다. “우리가 만약 거북선과 대적한 일본의 아다케세키라는 군선에 대해 자세히 가르치고 배웠더라면 300~400년 바다 속을 뒤져 그 잔해를 찾아다니지 않아도 거북선의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 갈 수 있었을지 모른다.”

 

(사진: 아다케 후네, httphello.ap.teacup)

 

아다케 후네(安宅船, 안택선)는 물위가 아닌 들판에서의 싸움에 능한 사무라이의 강점을 위해 만들어진 배다. 거북선은 왜병이 등선하지 못하도록 철첨이 박힌 귀갑 모양의 뚜껑을 덮어 왜병들이 배 위에 오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 자멸하게 만들었다. 아다케의 경첩 달린 판자벽의 다리를 무력화 시켰기 때문이다.

 

전쟁이 실체론이 아니듯 야구도 상대적 원리에 의해 생성되는 관계론이다. 비슷한 관계론적 사고가 다양하게 펼쳐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대기록의 주인공은 기억하지만 대기록의 상대방 이름은 아다케처럼 기억하지 못한다. 서건창의 200안타 순간 상대 투수도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그는 SK 와이번스의 채병용(32)이었다.

 

채병용은 유인구를 잘 던지는 투수는 아니다. 도망가기 보단 자신의 승부구를 믿고 정면 승부하는 스타일이다. 사복을 입은 채병용은 문학구장 안내요원이 입장을 제지할 정도로 달리 보이지만, 실제는 부드러운 성격이다. 하지만 유니폼을 입으면 돌아가지 않는 상남자다. 전성기가 지나고 있기는 하지만 SK의 황금기는 그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지난해 타고투저 시대에 채병용이 전성기의 모습을 선보인 경기가 있었다. 911일 문학구장에서 열린 넥센과의 경기였다. 최고의 피칭이었다. 선발 등판한 그는 9이닝 동안 4피안타 2실점 호투로 팀의 11-2 대승을 견인했다. 넥센의 강타선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았다. 4,459, 신인이었던 2002년 이후 무려 12년 만의 완투승이었다.

 

(사진: SK 와이번스)

 

이 경기를 채병용이 쉽게 가져갔던 이유는 넥센의 선두타자 서건창을 효과적으로 봉쇄했기 때문이다. 4타수 1안타로 잘 막았다. 3번의 타석을 모두 중견수 플라이로 처리한 서건창과의 승부에서 채병용, 정상호 배터리는 집요할 정도로 몸쪽으로 승부했다.

 

1회 첫 타석에서는 외곽으로 두 번, 3구째 몸쪽 이후 다시 4구째 가운데 변화구로 승부구를 던졌다. 6회에도 1,2구 몸쪽 3구째 외곽으로 변화구를 보여주고, 이후 4구 몸쪽 직구 5구 첫 타석과 같은 구질인 몸쪽 변화구로 승부했다. 재미를 본 채병용은 8회에는 처음부터 몸쪽을 노리고 연이은 직구를 던졌고 2구째 137km 인코스 빠른공으로 서건창을 아웃시켰다.

 

1011일에도 구원투수로 등판한 채병용은 서건창과 한차례 승부하면서 이번에는 외곽 유인구를 던졌다.(이날은 제구 자체가 안됐다.) 그러나 서건창은 바깥쪽 유인구에 말려들지 않았고 결국 볼넷을 얻었다.

 

그리고 문제의 1017운명의 장난처럼 서건창과 채병용은 목동구장에서 다시 만난다.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이면서 서건창의 200안타 대기록이 걸린 경기였다. 동시에 채병용으로서도 완투승의 좋은 기억을 안긴 넥센과 선발 투수로서 다시 만나는 경기였다. 포수도 똑같이 정상호였다.

 

1회말 첫타석에 서건창이 등장했다. 채병용은 승부의 패턴을 기억했다. 몸쪽이었다. 초구 낮은쪽 몸쪽 직구를 던졌다. 2구와 3구도 몸쪽 슬라이더를 뿌렸다. 볼카운트 2-1. 4구째 역시 채병용의 승부구는 몸쪽이었다. 인코스로 바짝 붙는 138km 직구. 서건창의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그는 이번에는 몸쪽 공에 당하지 않았다. 특유의 간결한 스윙이 이어지고 공은 파열음을 내며 우익수 쪽 2루타로 이어졌다.

 

채병용의 승부 패턴은 이번에는 승리의 패턴이 되지 못했다. 채병용의 이날 4번째 승부구는 9월 11일 4번째 타석에서 서건창을 중견수 플라이로 잡은 공과 같은 구질, 같은 코스였다. 선발로 등판해 이날 첫 타석을 포함해 서건창을 아웃시킨 투구 15개 가운데 12개가 가운데를 중심으로 한 몸쪽 공이었다. 자칫 199안타로 끝날 수 있는 그의 생애 매우 중요한 경기에서 서건창은 채병용이 안긴 패배의 패턴을 기억했을지 모른다. 그는 달랐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이 당했던 투수의 몸쪽 공을 무력화시켰다. 200안타 순간의 역사는 그렇게 쓰여졌다.

 

(서건창 vs 채병용, 영상 XTM, Edit By ThinkTanker)

 

그가 지난해 기록한 201안타는 투수와의 관계싸움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서건창은 그의 독특한 타격폼으로 이미 그라운드의 크리에이터다. 그러나 진정으로 서건창이 크리에이터라 불릴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밝힌 것처럼 투수와의 승부를 결과보다 과정에서 중요성을 찾는 마음가짐이 있었기 때문이다.

 

패배를 기억하고 같은 패배에 당하지 않는다. 승리를 기억하고 같은 승리의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 승리가 있으면 승리를 가져다 준 상대 패배의 패턴을 분석한다. 서건창이 보여준 야구의 관계론적 사고다.

 

관계론적 사고는 투수와 타자의 승부를 더욱 시각화해준다.

시간이 상당히 흐른 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서건창은 채병용의 네 번째 공을 이렇게 떠올렸다.

 

몸쪽 깊숙하게 들어온 공이었다. 지금도 슬로비디오처럼 기억난다.”

 

그의 200번째 안타는 그렇게 느리고... 아주 선명하게 기억되고 있었다.

 

By ThinkTan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