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및 권리: SKY SPORTS, KBO/Edit By ThinkTanker)
[정면승부를 바라는 팬들을 무시한 이승엽 고의사구]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 순간은 역사입니다.”
현지 중계진은 “언빌리버블(Unbelievable)”을 연발했다.
이제는 전설이 된 강타자 배리 본즈(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메이저리그 1998년 시즌 5월 27일까지 기록한 주자가 있을 때의 성적은 .330, 9홈런, 주자가 없을 때는 .276, 4홈런이었다.
본즈는 같은해 5월 28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경기에서 샌프란시스코가 6-8로 뒤진 2사 9회말 주자가 꽉 들어찬 만루에 타석에 들어섰다. 안타 하나면 최소 동점을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상대 감독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벅 쇼월터(현 볼티모어 오리올스 감독)는 본즈의 유(有)주자시 기록을 눈 여겨 보았을 것이다. 또한 본즈라는 이름값의 위압감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 쇼월터는 놀랍게도 만루상황에서 본즈에게 고의사구를 지시했다! 본즈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샌프란시스코는 1점을 상대팀으로부터 그냥 얻었다. 야구의 상식을 파괴하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창조적이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민망했다.
야구를 보는 관점의 문제였다. 만약 본즈에게 단타를 맞고 후속타자를 잡으면 8-8에서 연장전이라도 갈 수 있지만, 본즈를 거르고 후속타자에게 단타를 허용하면 8-9로 경기끝이었다. 그럼에도 쇼월터는 본즈의 3타점 이상의 장타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후자를 고르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현지 중계진은 엄청나게 흥분했다. 도대체 아무리 본즈가 무섭다고 어떻게 만루에서 타자를 거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쇼월터의 판단은 결과적으로 성공이었다. 애리조나의 투수 그렉 올슨은 후속타자 브렌트 메인을 우익수 라이너로 처리했으며, 결국 애리조나는 8-7로 승리했다.
(1998년 메이저리그 배리 본즈의 '만루 고의사구' 사건)
쇼월터는 경기가 끝나고 “감독이란 때로 팀이 가진 옵션이 부족할 때,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팀을 위해 반드시 승리를 챙겨야 하는 자리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고의사구는 감독의 작전이자 옵션이다. 원래 비난의 대상은 아니다. 승리를 위해서는 쇼월터처럼 쓸 수도 있다.
쇼월터 뿐만 아니다. 1955년 메이저리그가 고의사구를 공식적으로 기록한 이래 많은 감독들이 강타자를 필요에 따라 1루에 무혈입성 시켜왔다. 2008년에도 탬파베이 데블레이스의 감독 조 메이든은 텍사스 레인저스의 조시 해밀턴을 7-3으로 앞선 9회말 2사 만루에서 거른 적이 있다.
본즈는 2004년 시즌 162경기에서 무려 120개의 고의사구를 얻었고, 뉴욕타임즈는 본즈의 기록을 수학적으로 93년이 지나야 깨질 수 있는 기록으로 평가했다. 보통 리그의 한 팀이 얻은 시즌 전체의 고의사구 보다도 많았기 때문이다.
본즈나 해밀턴을 걸렀던 쇼월터나 메이든이나 공통점은 있었다. 고의사구에 이유와 맥락이 있었다. 해당 타자들에게 한방을 맞으면 팀이 패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언론의 눈총과 팬들에게 비난을 무릎 쓰고 살을 주고 뼈를 취했다.
그런데 LG 양상문 감독이 지시한 이승엽 고의사구는 어떠한 맥락도 찾을 수가 없었다. 절박하게 뼈를 취하기 위해 내줄 살이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지난달 31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LG 트윈스와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LG가 3-9로 뒤진 9회초 2사 2루에서 400호 홈런을 앞둔 이승엽에게 고의사구를 지시했다. 정확하게 고의사구는 아니었다. 하지만 포수가 일어서지만 않았지 옆으로 완전히 빠져 앉은 사실상의 고의사구였다.
감독의 지시 없이 LG 투수 신승현이 스스로 판단해 승부를 하지 않았어도 이 모습을 LG 벤치가 더그아웃에서 그냥 지켜봤다면 감독의 작전권 영역이다.
양상문 감독의 입장에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지시는 아니라고 두둔할 수는 있다. 팀은 크게 뒤지고 있고, 주말 스윕패가 거의 확정된 홈 팬들이 지켜보는 경기에서 이승엽에게 400호 홈런을 맞았다면 팀 사기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6점 뒤진 9회말 LG가 7점을 내서 역전할 수도 있는 것이 야구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표현하기에는 시나리오가 너무 억지스러웠다. 이미 팀은 필승조 이동현이 내려간 상황이었다. 양상문 감독이 스스로 사실상 승부에 백기를 든 것이었다. 여기서 이승엽을 걸렀다. 양상문 감독은 야구계에서도 알려진 학구파이자 신사인데 그답지 않은 전혀 어른스럽지 못한 모습이 나왔다.
더구나 이미 경기 전 그는 “이승엽의 400홈런을 축하해줘야 한다. 선수들에게도 피하지 말고 정상적으로 승부하라고 지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이날 우측 외야 관중석에는 야구팬들이 자리를 미리 잡아 대기록에 대한 기대치가 매우 높았다. 그럼에도 양상문 감독은 팬들을 등지고 스스로 자신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뒤집었다.
이날 경기를 중계했던 SKY SPORTS 이효봉 해설위원은 "LG 팬들도 이 상황을 이해할까요? 글쎄요. 이 장면은 찬성하기 어렵고 실망스런 장면입니다"라고 말했다.
양상문 감독의 고의사구는 다른 감독들도 모두 봤다. 좋지 않은 선례가 됐다. 이승엽을 거르지 않겠다고 하고 걸러도 괜찮은 전임자가 나타났기 때문에, 다른 감독들에게 이승엽 400호 홈런 피하기는 자칫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게임’으로 변질 될 오해의 소지가 생겼다.
이날 이승엽 고의사구 기사에 LG팬이라 밝힌 어느 팬이 남긴 댓글은 국내 한 포털의 베스트 댓글이었다.
“지(죄)송합니다...우리 감독 생각보다 너무 졸렬하네요..대실망입니다.”
이 댓글의 주인공이 정말로 LG 팬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위 의견에 대한 공감은 31일 오후 6시까지 1,709건, 비공감은 42건 이었다. 전체 의견의 무려 97.6%가 양상문 감독에 실망한 것이다.
(사진 출처 및 권리: SKY SPORTS, KBO)
대승적으로 봐야한다. 야구에서 말하는 대기록의 희생양이란 말은 생각보다는 과대평가된 말이다.
본즈의 73호 홈런이 터질 때, 행크 애론의 755호 홈런이 나왔을 때, 서건창이 200안타를 때렸을 때 상대투수가 누구인지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기록의 희생양이 아니라 단순히 대기록이 나왔을 때의 상대 선수로 기억하는 것이 맞다. 시간이 흐르면 담담해지는 것이 야구의 기록이다.
야구는 그렇게 발전해 왔다. 기록의 작성을 만들어줬다는 피해의식의 희생양이란 단어는 야구를 협소하고 옹졸하게 바라보는 시각이다. 대기록의 작성 자체가 야구의 풍성함, 리그의 흥행과 수준을 끌어올린다는 동업자의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
메이저리그가 침체됐을 때 새미 소사와 마크 맥과이어의 홈런 경쟁은 리그를 살렸다. 정상적으로 승부하는 감독과 투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감독과 투수들이 야구와 리그를 멋지게 만든다. 본즈에게 71호, 72호를 맞은 박찬호를 지금 와서 희생양이라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한국야구를 빛낸 개척자이자 승부를 건 멋진 남자로 기억된다.
이승엽의 대기록을 위해, 야구 발전을 위해 홈런을 일부로 맞아줘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고의사구를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렇게 이해하는 바보 같은 감독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야구의 품격’을 위해 정상적으로 승부하라는 것이다. '납득할 수 있는 고의사구'가 필요하다.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모습에서 야구의 품격은 높아지고 팬들은 환호한다. 오래전부터 야구가 인기 있을 때 경기의 품질을 위해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저품질 야구, 감독이 말을 손쉽게 뒤집는 ‘배반의 야구’가 시작될 때 팬들은 야구장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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