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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 창조적 글쓰기

무서운 삼성 타선...투수 괴롭히기의 진수

 

(사진 출처 및 권리= SKY SPORTS, KBO)

 

 

[최근 삼성 라이온즈 타선이 무서운 이유]

[투수는 타자에게 어떻게 무너지나]

 

투수의 어깨는 분필과 같다.”

 

KBO 리그 최초로 100200세이브를 거두었던 LG 마운드의 전설 김용수의 말이다.

 

야구팬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유명한 야구 격언이다. 맞는 말이다. 투수의 어깨는 소모성 부착물이다. 선수 생명과 더불어 어깨의 생명도 천천히 닳아 없어진다. 김용수의 분필론은 투수의 선수 경력 전체를 놓고 봤을 때 무리한 투구의 축적은 투수의 수명을 줄인다는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분필론은 하나의 개별 야구 경기에도 적용 가능하다.

 

모든 투수가 15회 연장 무승부 완투를 벌인 선동렬과 최동원처럼 던질 수는 없다. 당시 선동렬은 232, 최동원은 209개의 공을 던졌다. 이제는 과거의 추억이다. 토니 라루사(전 세인트루이스 감독)가 중간계투, 1이닝 마무리 개념을 정착 시킨 라루사이즘이후 현대 야구의 선발 투수 운용은 거의 패턴화가 됐다.

 

선발 투수가 잘 던져야 120개 내외다. 보통은 100개 안팎이면 투수 교체의 시점이 다가 온다. 그나마 어떤 선발 투수가 그날 100개 이상을 던졌다는 것은 조기에 무너지지 않았음을 뜻한다.

 

분필로 비유해보자. 투수에게 투구 수 100개는 10cm짜리 분필이다. 공을 던질수록, 이닝을 버틸수록 분필의 길이는 9cm에서 8cm로 짧아진다. 나중에는 손으로 쥐기도 힘들 정도인 1cm로 줄어든다. 결국 투수는 6, 또는 7, 혹은 그 이상 분필이 모두 닳아 없어지기 전에 타자들의 아웃카운트를 최대한 늘려야 한다.

 

타자의 입장은 반대다. 투수가 가진 분필의 길이를 빠른 시간 안에 줄여야 한다. 만약 5회 이전에 분필의 길이가 1cm가 됐다면 그날 경기의 승자는 타자가 될 확률이 높다.

 

그런 대표적인 경기가 나왔다. 7일 포항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였다. 더불어 이 경기는 삼성 타선이 왜 무서운 지, 투수를 어떻게 괴롭힐 수 있는 지를 잘 알려준 타자 승리의 모범 사례 같은 경기가 됐다.

 

일단 이날 삼성 타선을 상대한 SK의 선발 투수 크리스 세든의 스탯을 보자. 그는 2회말 아웃카운트 4개를 잡기까지 무려 71개의 공을 던졌다. 다시 강조하지만 2회가 안 끝났음에도 71개다. 단순 가정으로 중학 수학의 비례식을 활용하여 환산하면 만약 세든이 이날 9회까지 완투하며 27개의 아웃카운트를 잡았다면 그는 479개의 투구를 기록했을 것이다. 그만큼 살인적인 투구 페이스였다.

 

(사진 출처 및 권리= SKY SPORTS, KBO)

 

클로즈업 된 세든의 얼굴이 TV화면에 잡혔다. 괴로운 남자였다. 9회를 모두 던졌음에도 완투패를 한 투수의 표정처럼 보였다. 다 짧아진 분필 하나를 안쓰럽게 들고 있는 투수였다. 8월의 더위만큼 이미 녹초가 됐다.

 

삼성 타선은 세든의 분필을 조기에 몽당 분필로 만들어버렸다. 나중에는 몽당 분필을 잡은 투수의 손톱마저 닳아 없어지게 만드는 무서운 집요함을 선보였다.

 

1회말에는 고전했지만 2회말 세든의 공은 이효봉 해설위원의 말처럼 나쁘지 않았다. 로케이션은 스트라이크 존 공 한 개, 반 개 이내에서 타자가 결정해야 할 정도로 정교했다. 하지만 삼성 타선은 그 어려운 공들을 모두 골라냈다.

 

왼손 타자 구자욱과 박해민은 왼손 투수의 주무기인 바깥쪽으로 빠지는 슬라이더에 전혀 말려들지 않고 공을 선구하며 볼넷으로 출루했다.

 

특히 구자욱은 초구, 2구 모두 스트라이크를 당해 볼카운트가 0B 2S로 불리한 상황에서 타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 3, 4구째를 커트하더니 5구째에 처음으로 볼을 하나 골라냈고 7,8,9구째도 모두 커트한 뒤 2개의 후속 유인구에 말려들지 않으며 기어코 볼넷으로 출루했다. 한 타자에 11개의 공을 던지며 볼넷을 허용한 세든은 이후 매우 사기가 떨어진 채 공을 던졌다.

 

야마이코 나바로 역시 비슷했다. 세든이 너무나 잘 던진 오른쪽 타자 몸쪽 하단의 체인지업을 꾹 참고 체크 스윙으로 버텨내며 3B 2S를 만들었다. 코너워크와 볼넷이 부담스러워진 세든은 결국 가운데로 던질 수밖에 없었고 한복판 직구를 던지다 나바로에게 적시타를 맞았다.

 

최형우 역시 신중한 타격으로 6구째에 볼넷을 얻었고 박석민은 3B 1S라는 유리한 볼카운트를 만든 뒤 희생플라이를 쳐냈다. 후속 이승엽은 파김치가 다 된 세든을 2B 1S로 또 유리하게 이끌더니 우전 전시타를 때렸다. 7-0. 승부는 2이닝만에 사실상 결정났다.

 

세든의 분필은 그렇게 모두 소모됐다. 2이닝 77개 투구, 7자책, 6피안타, 4볼넷이 이날의 기록이었다.

 

아래 삼성 타선의 2회말 기록을 보면 투수 세든이 얼마나 괴로웠을지가 보인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투구수를 보자. 불리한 볼카운트에서 어떻게 살아났는지 구자욱, 나바로, 최형우의 카운트 싸움을 주목하자. 

 

 

 

 

 

 

 

야구에서 투수를 괴롭히는 방법은 안타와 홈런만이 아니다. 투수의 정교한 제구력에 맞설 수 있는 타자의 정교한 선구안은 타자가 가진 또 하나의 무기다. 제 아무리 맥스 슈어져, 클레이튼 커쇼라도 스트라이크만 던질 수는 없다. 볼을 던져야 한다. 그런데 그 볼을 타자가 모두 볼로 선구한다면 그때 투수가 설 자리는 마운드가 아니라 조기 강판 이후의 더그아웃 뒷자리다.

 

삼성 타선은 이날 투수 괴롭히기의 진수를 보여줬다. 왜 삼성이 통합 4연패를 하고 있는지, 왜 올해도 변함없이 정규시즌 1위를 지키고 있는지 새삼 느끼게 한 경기였다.

 

삼성이 이런 놀라운 타격을 할 수 있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집중력이다. 타석에서 집중력이 없으면 투수의 칼 제구에 대응할 수 없다. 공을 끝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집중력은 체력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유지되지 않는다. 여름에 체력 소모를 느끼지 않고 전통적으로 강한 삼성으로 부연 설명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언셀피시 배팅 (Unselfish Batting)’이다. 한국말에는 없는 단어지만 비이기적라는 ‘Unselfish Mind’는 전 세계 모든 스포츠 팀의 우승 목록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자세다. 혼자 잘 났다고 욕심 부리면 개인 성적은 좋을지 몰라도 팀은 우승할 수 없다. 사심 없이 팀 승리를 위해 노력하는 팀원이 많을 때 그 팀은 우승에 보다 가까워진다.

 

2회말 삼성의 구자욱, 박해민, 나바로, 최형우, 이승엽은 볼카운트에 따라 충분히 큰 스윙을 해서 장타를 노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욕심 부리는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침착하게 공을 골라내며 천천히 투수의 어깨를 고갈시켰다.

 

이날 그들은 경기에서 17-4로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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