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저 리프트(Scissors Lift)'라는 단어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건축과 관계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이 물체를 보면서도 정확한 명칭을 알아야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싱크탱커도 그랬다.
놀라운 것은 나는 이 기계를 과거에 여러 차례 사용(그것도 매우 유용하게!)했었다는 점이다. 직접 사용은 아닌 게임 와치독스(Watchdogs)의 가상 공간에서였다. 시저 리프트는 와치독스에서 필수 아이템이다. 밟고 올라가 목표물에 도달하거나 온라인 해킹 등 추격전에서는 효과적인 은폐의 도구가 된다.
자주 등장하고 빈번하게 사용된다. 아마도 백번은 넘게 탔을 것이다. 게임에서는 친절하게 ‘고소 리프트’라고 자막까지 물체에 박혀있다. 그럼에도 나는 명칭을 몰랐던 것이다. 이정도로 관찰력이 부족하다. 와치독스를 클리어하고 난 이후 시저 리프트라는 단어는 내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외양만 머릿속 어딘가에 저장된 채로)
그런데 이 녀석과 우연히 다시 마주쳤다. 이번에는 실제 상황이었다. 자태를 드러낸 녀석은 기름때가 검게 묻은 얼굴로 심드렁하게 거리의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게임에서 쉽게 자주 타고 올랐던 기억에 만만하게 보고 나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깜짝 놀랐다. 여기저기 기계의 내·외부에 붙어있는 빨간 딱지들.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보기보다 나는 안전하지 않다”였다. 무려 13개의 위험 표지가 붙어있었다. 전기적 문제부터 손이 작업대에 끼는 사고, 작업대 위에서의 주의사항까지 심각한 상해, 중상(serious injury)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납득할 수가 없어 다음날 호기심에 업체에 직접 전화를 걸어봤다. 얼마나 이 물건이 위험한지 문의했다. 업체 관계자가 답했다. “기계에 대한 일반적인 경고 표지이다. 장비 자체에 대한 위험은 없다. 다만 초과 적재나 초과 인원이 탑승할 때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살짝 덧붙였다. “연결 부위에 손이 끼는 사고가 나는 등 간혹 작업현장에서 드물게 사고가 나기도 한다. 직접 몇 번 사고를 목격하기도 했다.”
그는 대여나 판매의 입장에 있기 때문에 최대한 완화된 표현을 썼다. 통화를 끝내고 대체적으로 안전한 기계라고 이해는 했다. 그러나 “보기보다 나는 안전하지 않다”는 시저 리프트의 경고는 지워지지 않았다.
시저 리프트와 유사한 “보기보다 나는 안전하지 않다”의 위험성을 똑같이 느낀 적이 있다. 포수 마스크다. 야구에서 포수는 가장 힘든 포지션이다. 포수는 유일하게 경기 중 정면을 바라본다. 충돌을 가장 많이 당하는 위치에 있다. 150km가 넘는 빠른 공을 0.5초 안에 포구해야 한다. 가속이 붙은 파울팁은 대부분 톱스핀이 걸린다. 야구의 물리학에서는 RPM이 증가한다고 했다. 그래서 더욱 위험하다.
포수 마스크는 이런 위험을 막아주는 장비다. 실제 야구 경기를 봐도 파울팁을 포수 마스크에 부딪힌 포수는 대부분 잠깐 고개를 몇 번 흔들고 다시 경기에 임한다. 포수 마스크를 직접 만져 봐도 매우 튼튼하다. 외관상 안전장치라 부를 만하다.
그런데 심각한 문구가 포수 마스크와 헬멧에 붙어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이 장비는 경기상황에 따라 목과 머리를 다치게 하고 마비를 일으킬 수 있으니 절대 신뢰하지 말라.” 보이는 것과 다르게 포수 마스크는 믿을 수 없는 안전장치다.
한국 프로야구의 대표적인 명포수 였던 박경완은 포수 마스크에 대해 “(마스크를) 안 쓴 것 보단 쓴 것이 나으니까”라고 덤덤하게 말한 적이 있다. 그는 포수 마스크의 가치를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파울팁이 정말 싫다고 했다. “파울팁을 맞은 경기가 끝나고 숙소에 돌아오면 머리가 멍한 현상이 잠을 잘 때까지 이어진다.”
파울팁은 전도유망한 세계적인 포수를 평범한 1루수로 만들기도 한다. 주인공은 조 마우어(31·미네소타 트윈스)다. 이 젊고 잘생긴 포수는 2004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2006년을 포함해 3차례 아메리칸리그 타격왕에 올랐다. 2009년에는 타율 0.365, 28홈런 95타점으로 아메리칸리그 MVP에 선정됐다. 6차례 올스타에도 뽑혔다. 그는 포수는 타격이 약하다는 일반론을 무너뜨렸다.
PS4 야구게임 <더쇼(The Show)>를 아는 분들이라면 그 당시 유저 입장에서 전성기의 조 마우어가 타석에 들어서는 것이 얼마나 곤혹스러운지 기억할 것이다. 어떤 공도 쳐낸다. 교타자임에도 장타능력도 있어 매우 부담스럽다. 현실의 투수들은 더했을 것이다.
그의 포수 인생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은 2013년 8월20일 뉴욕 메츠전이었다. 상대 타자 아이크 데이비스가 친 파울타구가 마우어의 포수 마스크를 강타했다. 경기가 끝나고 그는 뇌진탕을 호소했고 시즌을 마감했다. 무릎 부상까지 겹치며 결국 포수 마스크까지 벗었다. 그는 현재 평범한 1루수다. 장타력은 물론 특유의 날카롭던 정확성까지 잃어버렸다.
포수 마스크는 마우어의 머리를 보호하지 못한 것일까.
마우어는 사실 전성기 때도 파울팁에 대해 신형 포수 마스크로 대비를 해왔다. 메이저리그에 티타늄 소재의 포수 마스크는 2007년 뉴욕 양키스의 호르헤 포사다가 나이키사의 제품을 쓰면서 처음 등장했다. 티타늄 마스크는 일반적인 강철프레임 마스크보다 10배나 강하면서 무게는 450그램 내외로 절반 정도의 무게 밖에 나가지 않는다. 마우어도 이 시기에 롤링스사의 티타늄 마스크와 헬멧으로 교체했다. 그러나 포수 수명을 마감시킨 문제의 동영상에서 그의 신형 마스크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마우어 뿐만이 아니다. 유사한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감독인 마이크 매서니는 마우어와는 반대로 현역시절 리그를 대표하는 수비형 포수였다. 안정된 수비로 4차례 골드글러브를 수상했으며 252경기 연속 무실책의 신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2006년 경기 도중 파울팁을 머리에 맞고 기억 상실 등 뇌진탕 후유증으로 주전 포수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듬해 은퇴했다.
라이언 더밋(애틀랜타 브레이브스) 같은 포수는 마스크를 써도 파울팁의 공포를 지울 수 없다고 솔직히 인정한다. 그는 지난해 mlb.com과의 인터뷰에서 “지금 리그를 둘러봐라. 포수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과학이 빨리 발전해서 우리를 살려줬으면 한다. (파울팁이) 너무 무섭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메이저리그 통계에는 뇌진탕으로 부상당하는 선수 가운데 4할 이상이 포수라는 데이터도 있다.
뇌진탕을 막기 위한 포수들의 노력이 어찌 티타늄 마스크뿐일까. 아이스하키 마스크형으로 얼굴 측면까지 완전히 가리기도 하고,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알렉스 아빌라는 반대로 신형 마스크에서 얼굴 정면을 위주로 보호하는 클래식 마스크로 되돌아갔다.
측면 보호용 마스크와 정면 보호용 마스크는 안전을 담보할 수 있을까. 매서니의 은퇴를 안타깝게 생각했던 케터링 대학 연구팀이 실제로 포수 마스크의 파울팁 충격 테스트를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측면이든 정면이든 결과는 큰 차이가 없었다. 포수 마스크는 파울팁의 충격을 근본적으로 막아줄 수 없다는 것이 연구팀의 결론이다.
다시 와치독스의 시저 리프트가 생각났다. 게임속 시저 리프트는 안전할 것 같았다. 시저 리프트를 작동하여 상승시키면 CPU의 적들이 절대로 하강 버튼을 누르고 강제로 나의 리프트를 내리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예상대로였다. 인공지능의 한계를 이용한 완벽한 은폐장소였다. 그러나 제작사인 유비소프트를 과소평가했다는 것은 아래와 같은 영상이 펼쳐진 뒤 알게 됐다.
와치독스의 시저 리프트는 헬기가 총알을 쏘는 공중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반면 야구의 포수 마스크는 어떤 방향에서 날아오는 파울팁도 얼굴을 보호해 낸다.
다만 뇌를 보호할 수 없을 뿐이다.
마우어가 시즌 아웃 된 뒤 미네소타 트윈스의 테리 라이언 단장은 현실을 매우 냉정하게 인터뷰했다. “포수란 그런 자리다. 누군가는 그 자리에 앉아야 한다. (포수가) 어렵다고 사이보그를 앉힐 수는 없지 않은가.” 조금은 차가운 발언이지만 사실이다.
한국 프로야구도 향후 마우어나 매서니 같은 사례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포수 희소성의 시대다. 어린 야구 유망주들이 포수를 기피한다고 한다.
더밋의 말처럼 포수의 뇌를 보호할 수 있는 과학의 발전이 시급하다.
포수가 상대의 강펀치를 경기마다 참아야 하는 복서는 아니지 않는가.
By ThinkTanker (http://creationthinktank.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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