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긴 생머리가 매력적이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세상의 모든 맑음을 머금은 듯 한 긴 눈썹은 소년들의 마음을 울렁이게 했다.
나는 행운아였다. 소녀가 나의 짝꿍이었다.
짝꿍은 일주일마다 줄 단위로 바뀌었다. 소녀와 첫 짝꿍이 된 월요일이 됐다.
월요일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소녀와 헤어지는 문제의 토요일 오전이 왔다.
미술시간이었다. 교통안전 포스터가 주제였다.
미술은 어렸을 때 트라우마였다. 모든 그림이 내게는 수채화가 됐다.
알려진 대로 포스터는 간단명료하게 붓에 물을 조금 묻혀 사진을 찍듯이 드라이하게 그려야 한다.
소녀는 포스터도 잘 그렸다. 포스터 표어와 그림이 완벽하고 깔끔하게 분리됐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들 열심이었다. 표어들도 다양했다.
자나 깨나 차 조심, 왼손 들고 지나가세요, 파란불이 생명 신호 등
그 나이에 맞는 평범한 표어들로 기억한다.
살짝 곁눈질로 옆에 앉은 소녀의 포스터 표어를 봤다.
그런데 이게 뭔가...!
‘5분 먼저 가려다 50년 먼저 간다.’
다시 봤다.
‘5분 먼저 가려다 50년 먼저 간다.’
순간적으로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물어봤다.
“이 말이 무슨 뜻이야?”
“너는 이것도 모르니? 5분 급하게 먼저 가려다 사고가 나면 50년 먼저 일찍 죽는다 잖아.”
소녀는 미소를 흘리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독해력이 부족한 나이였나 보다. 부끄럽지만 소녀의 한마디에 이해가 갔다.
그리고 온몸이 차가워졌다. 언어가 주는 무서움이 전신을 휘감았다.
위력적인 표어였다. 소년에게 50년은 앞으로 다가올 거대한 시간이었다.
5분 잘못하다가 송두리째 인생을 날릴 수 있다는 경고가 그대로 칼이 되어 심장에 박혔다.
조숙했던 소녀의 창조적 마인드가 부러운 면도 있었지만,
이내 그 부러움은 회색의 섬뜩함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백색의 소녀의 입에서, 아니 뇌에서 어찌 이런 가공할 말이 떠올랐을까.
소녀가 다시 보였다. 비범함이었을까.
소녀의 포스터는 교내 포스터 대회에서 1등까지 차지했다.
그런데 며칠 뒤 충격적인 반전 드라마를 맞이했다.
여기저기 벽에 붙어있는 포스터에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문구를 보았기 때문이다.
5분 먼저 가려다 50년 먼저 간다.,. 5분 먼저 가려다 50년 먼저 간다...
소녀는 표절녀 였다. 이미 나라에서 시책으로 동네에 배포된 교통 캠페인 포스터 표어를
100% 그대로 따온 것이었다. 친구들에게 들어보니 포스터 대회는 교내에만 국한됐고
외부로 출품되지 않았다고 하니 더욱 확실해졌다. 소녀는 크리에이터가 아니었다.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아직도 포스터 표어를 생각하면 소녀의 표절문구가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나 그 표어가 그다지 좋게 기억되지는 않았다.
질긴 생명력을 갖는 스토리는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는 20년 전이나 현재나 어린이들은 모두 그 이야기의 구성과
메시지를 정확히 복사할 수 있다.
그런데 ‘5분 먼저 가려다 50년 먼저 간다’ 역시 토끼와 거북이였다.
인터넷을 보니 아직까지도 이 표어는 어린이들에게 잘 팔리는 스테디셀러였다.
정말 놀랍고도 끈질긴 언어의 생명력이다.
어린이들뿐만이 아니다. 그사이 대통령이 몇 명이나 바뀌었는데
정부대표 민원전화 포스터에도 또 ‘5분 먼저 가려다 50년 먼저 간다’이다.
국내 포털에는 ‘5분 먼저 가려다’가 자동 검색어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다.
이 표어를 지금까지 여러 사람에게 기억하게 한 것을 보면 표어는 대성공이다.
표어의 최초 제작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역대급 작업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 표어는 들으면 왠지 기분이 나쁘다. 교통안전을 순간적으로 환기 시킨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도로를 횡단하거나 운전할 때 한 번도 이 표어를 떠올린 적은 없다.
언어가 직접적으로 “잘못하면 넌 죽어”로써 죽음을 거론하는 것이 조심보다는
불쾌함과 거북스러움으로 다가온다. 당신의 어린 딸이 뇌에서
이런 사고의 싹이 자라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다. 기사를 검색하다가 놀랍게도 오래된 한 신문에서
너무나 반갑게 우군을 만날 수 있었다. 마음속에서 박수를 쳤다.
(사진: 경향신문 캡쳐)
신문에 기고하신 그 분은 싱크탱커의 생각을 그대로 대변했다.
섬뜩한 표현을 순화(醇化)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순화는 사전적으로 ‘정성 어린 가르침으로 감화한다’는 뜻이다.
그는 핵심문장으로 자신의 뜻을 정성 어린 가르침으로 감화시키고 있었다.
“어떤 표어에서도 인간성을 저하시키고 삶의 공간을 메마르게 하는
문구는 배제되어야 한다. 인간의 근본에 해악을 미치지 않는 표어가
제작되어야 한다. 표어 제작에 신중한 언어선택이 있어야하겠다.”
외국을 둘러봤다. 외국의 교통안전 포스터도 공포스러운 사진 등 끔찍함이 있긴 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깔끔하면서도 세련되고 품위 있게 공포를 전달했다.
'오늘 조심하면 내일 나는 살아있다.' 굳이 50년까지 가는 협박의 과장법을 쓰지 않고도
의미는 진중하게 이동한다. 바닷가에 담그는 10개의 발가락도 안전을 지켰기 때문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국내에도 노숙인 위기대응 콜에서 만든 아래 사진과 같은
훌륭한 포스터와 표어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길에서 잠들면 영원히 잠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곰인형을 눕혀놓았다.
노숙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포스터지만, 취객 등 일반인도 해당이 될 수 있게
범용적이다. 코믹하면서도 포스터의 취지를 자연스럽게 전달한다.
웃음이 나면서도 가슴은 서늘하다. 진정한 크리에이터의 창조 작업이다.
만약 사진 속 표어를 이렇게 바꿔보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길에서 5분간 잠들면 50년 먼저 간다.’... 사실 둘은 같은 뜻이다.
그런데 의미가 완전히 다르게 느껴진다.
곰 인형 사진에 50년 먼저 간다를 표어로 했다면 블랙코미디가 됐을 것이다.
사실 포스터의 표어는 군사적으로 심리전 삐라에 자주 쓰이던 수단이다.
한국전쟁 당시 삐라는 ‘들리지 않던 총성’이고 ‘종이폭탄’이며, ‘심리전의 보병’이었다.
서울대 김영희 교수의 논문 <종이 한 장에 담긴 치열했던 심리전>에는
당시의 데이터가 수록되어 있다. 유엔군은 B-29 폭격기로 북한에 25억장의 삐라를
살포했으며 북한의 대 남한 삐라는 약 3억 여장이었다.
유엔군의 엽서 크기 삐라는 한반도를 20번 덮는 엄청난 분량이었다.
효과도 있었다. 북한군과 중국군 포로들은 삐라를 읽고 자진해서 항복을 결심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안전보장증명서 형식의 삐라는 포로로 잡힌 대부분의 적 병사가
소지하고 있었고, 공산당의 하급간부들까지 만일을 위해 소지한 것으로 조사됐다.
(사진: 유엔군의 대 북한군 이간 유도 삐라, 김영희 교수 논문 '종이 한 장에 담긴 치열했던 심리전')
전쟁은 군인의 목숨을 담보한다. “(휴전선) 넘어오면 살려준다”
심리전 삐라도 그렇게 제작됐다. 그러나 강남역 사거리가 폭탄이 떨어지는 전쟁터는 아니다.
횡단보도를 건너면서까지 생명을 거론하는 군사삐라를 연상시키는 ‘50년 먼저 간다’라는
삭막한 표어를 21세기에 아직도 써야만 하는 것일까.
언어말이 사회말이라고 했다. 하나의 언어는 사회의 언어가 되고
사회의 언어는 사회의 성격을 규정짓는다. 50년 먼저 간다는 표어가 만들어졌음에도
대한민국은 그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고 따진다면 굳이 반박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그 표어만큼이나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는 하나의 소문도 있다.
그 표어를 썼던 그때의 백색 소녀가 중학교에 들어가
'순수를 잃어버린 잘나가는 검은색 소녀'로 변했다는...
By ThinkTanker (http://creationthinktank.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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