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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 창조적 글쓰기

신경숙 작가의 표절 해명, 실망을 주는 이유

 

(사진 출처 및 권리: 연합뉴스TV)

 

[‘애매성을 담보로 결과에 승복할 줄 모르는 사회]

[신경숙 작가의 의문의 창작론]

 

# 1

 

도둑이 물건을 훔치다 현행범으로 경찰에 잡혔다.

 

경찰서에서 경찰이 조서를 만들며 물었다. “혐의 사실 모두 시인하지?”

수갑을 찬 도둑이 경찰에게 대답했다.

 

당신의 문제 제기가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 2

 

남편이 바람을 피우다 아내에게 불륜 현장이 발각됐다.

화가 난 아내가 말했다. “이래도 시치미야?”

남편이 대답했다.

 

당신의 문제 제기가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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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하이 코미디다.

 

신경숙 작가의 표절 해명 표절이란 문제제기를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1, 2와 크게 다르지 않다. 18일 출판사 창작과 비평(창비)’의 해명 일부 문장들에 대해 표절의 혐의를 충분히 제기할 법하다는 점을 인정한다와 판박이다. 서로 입이라도 맞춘 것일까.

 

도대체 이게 뭔가. 불명확하다. 작가는 분명 언어의 주인인데 이번 표절 문제에서는 언어의 주체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경숙 작가로부터 듣고 싶은 이야기는 국회의원이 증인은 맞다, 아니다로만 대답하세요맞다·아니다”, 개그콘서트에서 김기리가 공감, 비공감에 따라 관객에게 호응을 유도하는 말해~ Yes or No”였. 표절 인정인가. 아닌가.

 

신경숙 작가의 해명이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사는 이유는 애매하기 때문이다.

 

애매성(ambiguity, 曖昧性)<창조의 재료탱크>에서 여러 차례 이야기 했지만 창의성 기법 가운데 하나다. 많은 작가들이 사용하는 방법이다. 영국 시인 윌리엄 엠프슨의 지적처럼 애매성은 둘이나 그 이상의 서로 다른 태도나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나 표현을 말한다. 정보의 공백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채울 수 있는 여지를 준다. 그만큼 다양한 해석을 낳아 창작에 유리하다.

 

하지만 잘못을 인정한다는 입장 표명은 애매성의 영역이 아니다. 정보의 공백이 있어선 안 된다. 확실해야 한다. “표절했다. 사과한다. 자숙하겠다.” 세 마디면 끝나는 것이다.

 

신경숙 작가가 사과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혹시 사과 원문을 오해할까 싶어 경향신문 인터뷰 전문을 자세히 읽어봤다. 사과의 강도가 약한 것은 아니었다. “<전설>을 읽고 또 읽으면서 쇠스랑이 있으면 내 발등을 찍고 싶은 심정이었다는 센 표현을 신경숙 작가는 분명히 썼다. 자숙하겠다는 말도 했다.

 

그러나 세 마디가 아니라 두 마디였다. 가장 중요한 첫 마디인 표절했다는 없었다.

 

이에 문학계 일부 교수는 사과의 강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정도면 신 작가가 표절을 인정한 것이기에 문학계의 자성과 자정 노력이 중요하다는 말도 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납득하기는 어렵다.

 

언어말이 사회말이라고 했다. 독립 운동가이자 언어학자인 이희승 교수를 비롯해 많은 국문학자들이 지적했다. 사회 구성원들이 쓰는 언어가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인간의 정신을 만든다. 작가의 텍스트는 타인의 뇌와 심장으로 전이된다. 심지어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버리기도 한다. 작가 이지성은 미녀 당구선수 차유람과 결혼했다. 자신이 쓴 훌륭한 책이 계기가 됐다.

 

이렇게 작가는 자신의 인생뿐만 아니라 사회를 만드는 사람이다. 책임이 따르는 사람이다. 작가를 비롯해 모든 언어를 다루는 사람들이 갖는 중요한 책임감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곡뿐만 아니라 수많은 가사의 언어를 직접 만들었던 가왕조용필은 가수는 자신의 노래 가사에 책임을 져야한다. 가사는 시간이 흘러도 시대의 감정을 담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허투루 써서는 안 된다는 명언을 남겼다. 조용필의 노래가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의미를 잃지 않고 애창되는 이유는 가사의 품격과 보편성 때문이다.

 

(사진 출처 및 권리: SBS)

 

하지만 신경숙 작가의 표절이란 문제제기를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책임 있는 작가의 적절치 못한 언어였다. 품격은 찾을 수 없었고 보편성으로 차용할 수도 없었다.

 

이 언어는 애매성을 담보로 결과에 승복할 줄 모르는 사회를 대변한다.

 

이 언어는 나의 잘못을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고 내 잘못을 지적한 누군가의 생각을 인정하는 벽 뒤에 숨는 4차원 언어이다.

 

이 언어는 엄밀하게 말하면 상대의 문제 제기행위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다. ‘문제의 내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 제기. 문제의 잘못을 내가 인정하는 것과 타인의 문제 제기를 인정하는 것은 메르스가 단순 독감인가, 전염병인가를 판별하는 것과 유사한 하늘과 땅 차이의 개념이다.

 

이런 언어를 한국문단의 아이콘 신경숙 작가가 썼다는 것이 너무나 실망스럽다. 미래의 신경숙을 꿈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좋지 않은 선례의 언어가 됐다. 벌써 이 언어는 SNS에서 유행어처럼 번지고 있다.

 

앞으로 사회 구성원이 어떤 잘못을 하고 내 잘못에 대해 당신이 문제제기를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이 유쾌하지 않은 언어를 쓴 다면 그 사회의 성격은 ...” 세 글자로 정의할 수 있다.

 

더구나 신경숙 작가와 창비는 처음부터 사과를 한 것이 아니다. 첫 입장은 완강하게 표절 불인정이었다. 이후 여론의 큰 역풍을 맞자 한 발 물러서며 문제 제기의 인정으로 둔갑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사과를 했다면 이처럼 언어를 뒤바꾸는 스타일 구기는 모습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사진 출처 및 권리: SBS)

 

또 한 가지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은 신경숙 작가의 창작에 대한 생각이다.

 

창작은 기본적으로 어렵다. 과정이 고통스럽다. 셰익스피어부터 월트 디즈니까지 역사 속 유명한 17명의 크리에이터들의 발자취를 연구했던 <크리에이터스>의 저자 폴 존슨은 창조는 즐겁기보다는 인내해야 하는 괴롭고 혹독한 경험이며, 차라리 창조자가 아니길 바라는 때도 많다는 게 그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다라고 기록했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은 자신의 명시 <승무(僧舞)>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라는 단 두 줄의 명문장을 탄생시키기 위해 무려 7개월을 고민했다. 완벽한 창작은 이토록 고통스럽다.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흔하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There is no new thing under the sun)”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의 역사는 깊다. 구약 성경 에클레시아스테스에서 솔로몬이 처음 썼다. 셰익스피어가 이후 타인을 차용하지 않는 크리에이터들은 없다(Neither a borrower nor a lender be)”고 받았다. 창작하는 사람은 자신만의 창작의 재료와 저장고가 있기 마련이다.

 

지난 포스팅에서 싱크탱커는 2013SBS <힐링캠프>에 출연한 신경숙 작가의 발언을 바탕으로 신경숙 작가가 표절했다고 믿기 보다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임병석과 유사한 사례일 가능성을 언급했었다. 임병석처럼 창작의 저장고에서 재료들을 꺼내는 과정에서 누군가의 날 것 그대로가 튀어나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2015/06/18 - 신경숙은 임병석이었을까. '기쁨을 아는 몸'의 의문

 

누군가의 날 것 그대로가 튀어나올 때, 이것을 다시 자신의 창작물로 바꾸려면 맥락만큼은 새롭게 설계해야 한다. 살바도르 달리, 파블로 피카소, 모차르트, 베토벤 등 수많은 크리에이터들도 활동기간 표절의혹을 받았지만 자신만의 창작세계가 무너지지 않은 이유는 창조의 맥락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래의 이번 경향신문 인터뷰 내용은 신경숙 작가의 창작론에 오해의 소지를 준다.

 

전설이외에도 <기차는 7시에 떠나네>(장편), ‘작별인사’(단편) 1990년대 말의 작품과 심지어 최근작인 <엄마를 부탁해><어디선가>에 이르기까지 무차별적으로 표절 의혹이 이는 상황입니다.

 

“(이전 생략)...책을 읽고 소설을 쓰는 게 내 일이에요. 그런데 어떤 소설을 읽다보면, 어머 어쩌면 이렇게 나랑 생각이 똑같을까 싶은 대목이 나와요. 심지어 에피소드도 똑같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동서고금을 떠나 사람들의 생각은 비슷하구나, 반가운 기분마저 들어요 (이하 생략)”

 

- 많은 독서, 특히 필사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외워진 문장을 자신의 문장으로 오인하는 전이의 가능성도 제기됐는데요.

 

글쎄요. 어떤 소설을 한 권 쓰면, 그것은 온전히 그 사람만의 생각인가요? 내가 태어나서 엄마를 만나는 순간부터 엄마는 내 안에 들어와서 말과 행동에 영향을 주잖아요. 인간이 겪는 일들이 완전히 다르지는 않은데, 같은 이야기라도 내가 쓰면 어떻게 다르게 보일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내 글쓰기였어요. 그리고 나만의 문장을 쓰려고 늘 노력해왔어요.”

 

이 인터뷰를 바탕으로 신경숙 작가가 자신이 접했던 기존 작품들의 일부 문장을 그대로 따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것이 이후 다른 사람의 생각과 문장, 에피소드가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보편적이라면 마치 자신의 작품에 쓸 수 있지 않느냐는 생각의 정당성을 표현하는 것 같은 오해를 준다. 이번에 문제가 된 기쁨을 아는 몸과 동일성을 지적 받은 여러 문장들이 대표적이다. 신경숙만의 문장으로 바꿨다고 했지만 왜 수 차례 자꾸 똑같은 문장들이 표절 문제로 반복되는가.

 

단순히 생각이 같다고 그대로 가져다 써선 안 될 것이다. 언어와 사고의 보편성만으로 한꺼번에 아우르기에 21세기 저작권과 콘텐츠 시대는 신경숙 작가가 등단하던 1980년대 초반과 너무 많이 변했다.

 

신경숙 작가가 말한 어떤 소설을 한 권 쓰면, 그것은 온전히 그 사람만의 생각인가요?”의 대답은 요즘 시대에는 그렇다이다.

 

작가의 언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활자화돼 시장에 나왔다면 이미 돈을 받아야 구매할 수 있는 상품이다. 생각과 문장이 같더라도 먼저 써서 상품이 됐다면 그 저작자가 선점자로서 상품의 주인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상품의 주인이라고 남에게 주장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썼다고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필요하다.

 

만약 <엄마를 부탁해>의 특정 문장을 그대로 가져다 쓴 어떤 작가가 신경숙 작가 앞에서 이 문장들은 내가 기존에 생각해 왔던 것이고 누구나 쓸 수 있는 보편적 문장이다라고 주장한다면 신경숙 작가는 그 작가에게 자신의 문장을 허락할 수 있을까.

 

(사진 출처 및 권리: SBS)

 

이번 논란을 통해 인간적으로 안타깝게 신경숙 작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녀의 표현처럼 "자신의 기억을 믿지 못할 정도"로 창작의 저장고가 넘치면 스스로 데이터 정렬을 하기 힘들 것이다. 그녀가 표절을 명시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작가 생명에 큰 타격이었을 것이다. 그동안 쌓아온 세계적 명성에 흠집이 나는 것은 한국 문학에도 마이너스다

 

시간의 해결에 맡기는 것이 맞을 수도 있다. 자기검열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그녀가 절필하지 않았다는 것은 창작을 멈추지 말아야 하는 크리에이터의 관점에서 옹호할 수 있다.

 

그런데 그녀가 다음 책을, 적어도 독자들에게 돈을 받고 출판할 때, 나는 그 책을 구입할지 한 번은 망설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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